"어깨에 살이 오르던 초등학교 3학년때, 방과후 집에 왔더니 엄친께서 제 키에 맞춰 지게를 만들어 두셨더군요."인따르시아 김현제(金賢濟·47) 사장의 '노동'은 그 때부터 시작됐다. 친구들이 소에게 꼴 먹이는 것을 구실로 동산에서 한창 전쟁놀이를 벌일 때 그는 늘 논이나 밭에서 일을 해야 했고 가끔 잔꾀라도 부릴라치면 불호령이 떨어졌다. 가난 때문은 아니었다. 그의 집안은 천안에서 2시간 남짓 걸렸던 충남 천안시 동면 구도리 일대에서 땅부자로 통했다.
초등학교 시절 어느 여름의 일이다. "마당에 피운 모깃불 옆으로 친척 어르신들이 오랜만에 모였는데 제 책 읽는 소리가 마당까지 안 들린다고 해서 굉장히 혼이 났습니다." 그래서인지 김 사장은 비교적 작은 체구와 차분한 성격에 어울리지 않게 목소리가 크다. 덕택에 학도호국단 시절 대학 총학생회장도 한 것 같다고 한다. "목소리 큰 사람은 사기를 못 칩니다. 지금도 단 둘이 속삭이는 방식의 상담은 어울리지 않을 뿐더러 잘 하지도 못합니다."
김 사장이 양말과 인연을 맺은 것도 부친 영향 때문이다. 농사를 접고 일가가 서울로 이사한 뒤 부친이 시작한 첫 사업이 주문자상표부착(OEM) 방식의 양말 제조였다. 1978년 대학 졸업후 그의 '노동'도 자연스레 공장일로 바뀌었다.
가내수공업 규모에 불과하던 회사가 81년 '원창물산' 으로 새롭게 출발했을 때 사업을 물려받은 김 사장은 아직도 이탈리아 밀라노 첫 출장 때의 충격을 잊지 못한다. 공항에서 '베네통' 매장상품의 현란하고 세련된 색상과 디자인을 보면서 손뜨게질로 자수를 놓은 자사 제품이 떠올라 낯이 뜨거워졌던 것이다. 출장기간 그의 눈을 사로잡은 것은 미국 블링턴사의 입체 양말(양말 겉면에 굴곡 무늬를 가미한 양말). 귀국 후 블링턴사의 자수·편직기 제조업체를 수소문한 김 사장은 83년 밀라노에서도 자동차로 3시간이나 걸리는 브레시아의 편직기 제조업체를 직접 찾아갔다.
"대당 가격이 우리 돈으로 3,000만원이었습니다. 국산 기계가 200만원 하던 시절이었죠. 브레시아에서도 한국에서 왔다니까 반신반의하더군요." 그는 현지에서 3개월간 기계 작동법을 익힌 뒤 향후 5년간 한국 업체에는 동일 기종의 기계를 팔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24대(당시 7억원)를 사들였다. 하지만 가진 재산을 모두 쏟아부은 기계는 뜻대로 움직여주지 않았다. 국산 실의 품질이 예민한 기계를 받쳐주지 못했던 것이다. 9개월 동안 이탈리아를 오가며 기계를 개조했고 그 사이 몸무게는 7㎏이나 빠졌다.
95년 OEM방식을 버리고 독자브랜드 '인따르시아'를 만들었다. 인따르시아는 이탈리아어로 '섬세함'을 뜻한다. 사업 초기 국산 실의 품질 때문에 기계를 못 돌렸던 경험, 즉 품질의 교훈을 잊지 않기 위해서였다고 그는 말했다.
시련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양말에 웬 패션…'이라는 편견에 부닥친 것이다. 백화점 이곳 저곳을 노크했지만 한 곳도 관심을 가져주지 않았다. 그러다 현대백화점 압구정점 입구에 간신히 판매대를 얻어 시작한 영업이 '대박'을 터뜨렸다. 어린이날 선물용으로 엄청나게 팔린 것이다. 소문이 퍼지면서 이젠 지점만도 전국 200여개로 늘어났다. 미국과 스웨덴 일본 중국 등지로의 수출물량도 날로 늘고 있다.
김 사장의 골프 실력은 프로급(핸디5)이다. 그는 골프장에서 좋은 샷을 칠 때마다 '굿 샷' 대신 '인따르시아'라고 외친다. "이젠 지인들이나 골프장 직원들도 저를 만나면 첫 인사가 '인따르시아'입니다. CEO의 얼굴이 브랜드가 된 셈입니다."
3년전 성공한 기업을 소개하는 한 방송 프로그램으로부터 출연 섭외를 받았을 때 김 사장은 완곡히 사양했다. "인따르시아를 베네통만큼 키우고 난 뒤에 응할 테니 조금만 기다려 주십시오"라고.
/최윤필기자 walden@hk.co.kr
● 김현제 사장은 누구
1955년 충남 천안 출생
78년 충남대 졸업. 94년 성균관대 경영대학원 졸업
81년 동수종합시장 원창물산 설립(대표이사)
95년 가보통상 설립. 인따르시아 출범
98년 인천벤처협회 이사. 인따르시아로 상호 변경
● 인따르시아는 어떤 회사
인따르시아는 1975년 서울 구로동의 이름 없는 가내 수공업체로 출발했다. 하지만 사사(社史)는 81년 인천 부평의 4층 짜리 상가건물(동수종합시장)을 사들여 원창물산(주)을 출범시킨 후부터 시작한다. 줄곧 이브생로랑 등 외국 브랜드의 국내 하청업체에 머물다 '인따르시아'라는 브랜드를 선뵌 것은 95년 7월. 당시로서는 생소한 패션 입체양말을 출시하며 매년 30% 이상의 매출 성장률을 기록, 일약 양말업계 1위 기업으로 부상했다. '향기나는 양말' 등 특허만도 100여개에 달한다.
2000년부터 패션 내의 '바쉬'를 선뵜고, 최근에는 골프용품도 출시했다. 6년간 120억원을 투입해 자체 개발한 상온 원적외선 방출 액상물질 '인스바이오'를 양말, 의류, 침구류, 탈취제 등에 적용하고 있다. 이 제품들은 탈취는 물론 혈액순환과 자외선 차단, 항? 정전기 방지 기능을 인정 받아 특허를 획득했고, 올해부터 전국 육군클럽(옛 PX)에 납품하고 있다. 직원 160명에 지난 해 400억원의 매출을 올렸고 올해는 700억원이 목표다. 스웨덴 스페인 미국 일본 등지로의 수출이 매출의 약 10%를 차지하고 있으며 내달부터는 중국 상하이에 진출한다.
인따르시아는 최근 속옷에 잠금장치를 부착한 '엄중단속'이라는 제품을 출시, 여성계로부터 '정조대' 논란과 함께 '성폭력의 희화화'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김현제 사장은 "연인들의 '약속'을 구체화한 속옷을 만들어보자는 순수한 의도에서 기획된 제품이라는 점을 이해해달라"고 부탁했다. 인따르시아는 10월중 서울 서초동으로 본사를 이전하고 내년 3분기쯤 코스닥 등록을 추진할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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