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가위(9월21일)를 앞두고 옛 문화를 지켜온 종갓집의 이야기를 담은 '명문 종가를 찾아서'(컬처라인)가 발간됐다. 사단법인 한배달우리차문화원 이연자(李蓮子·57·사진) 원장이 지난 1년 6개월간 전국의 종가 16곳을 취재해 그곳 사람들의 이야기를 생생한 사진과 함께 실었다.임진왜란 당시 의병을 일으킨 고경명(高敬命) 종가, 무오사화때 목숨을 잃은 대학자 김종직(金宗直) 종가, 영남의 대표적 유학자 김굉필(金宏弼) 종가, 실학자로 이름 높은 박세당(朴世堂) 종가 등이 그가 탐방한 곳으로, 조상을 모시는 사당이 있고 종손들이 지금도 거주하고 있다.
원래 차에 관심이 컸던 저자는 우리 고유의 의례와 예절로 관심분야를 확대하다 자연스럽게 종가로 눈을 돌렸다. "산업화의 진행으로 우리 문화가 많이 사라졌지만, 종가에는 제례 의식과 내림 음식, 전통 복식 등이 아직 남아있어 기록으로 남기고 싶었어요."
저자는 가급적 의례가 있는 날 종가를 방문했다. 특히 기억에 남는 것은 올 2월 충남 공주의 이유태(李惟泰) 종가에서 본 12세 종손 이정우(李禎雨)씨의 회갑연. 잔칫상에는 축의금, 꽃다발 대신 친척과 친구들이 보내온 축하 글과 그림이 수북이 쌓여 있었다. 표구를 한 것도 있었고 컴퓨터로 쳐 인쇄한 것도 있었다. 이정우씨는 가족 앞에서 글을 일일이 소리 내 읽었다. 회갑을 축하한다, 무병장수하라, 집안을 잘 꾸려온 것을 치하한다는 등의 내용을 읽으면서 이씨와 가족 모두 흐뭇한 표정이었다. 저자 이씨는 "잔칫날 축의금만 달랑 보낼 게 아니라, 짧더라도 축하 글 한편 전하는 건 어떨까" 제안한다.
강원 강릉의 정응경(鄭鷹慶) 종가에서 저자는 고스란히 살아있는 가정 신앙을 발견한다. 음력 3월중 좋은 날을 잡아 가정의 길흉화복을 관장하는 성주신(城主神), 불의 신이자 음식 맛을 관장하는 부엌의 조왕신(□王神), 재산을 지킨다는 지신(地神)에게 정화수 한 그릇과 시루떡을 차려놓고 고사를 지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서울 강남구 수서동 광수산 남쪽에 조상묘 720기를 모시고 있는 광평대군(廣平大君·세종의 다섯째 아들)의 19세 종손 이규명(李揆明·51)씨가 1,000명의 문중 사람과 선조제를 올리는 광경, 이 이(李 珥)의 15대 후손 이천용(李天鏞·60)씨가 일산신도시의 현대식 아파트에 조상의 신주를 모시고 있는 모습도 책에 나온다. 김방걸(金邦杰)의 12대 종손 김구직(金九稷·81)옹과 아들 김원길(金源吉·60)씨가 방 열일곱개의 저택을 지례예술촌이라는 창작 공간으로 개방한 사연, 독립운동과 반독재 투쟁을 벌인 김창숙(金昌淑) 종가의 며느리 손응교(孫應喬·85) 할머니가 시아버지에게 담뱃불을 붙여드리다가 담배 맛을 배워 애연가가 된 이야기도 실려있다.
이연자씨는 그러나 종가를 둘러보면 둘러볼수록 걱정이 많다고 한다. 현재 종가를 지키는 후손 대부분이 70대 전후의 고령자들이라 이들이 세상을 뜨면 도시에서 생활하는 후손이 시골 종가를 지키고 살 가능성이 높지 않아 보이기 때문이라고. 이씨는 "종가에 사람이 살지 않으면 건물은 남겠지만 옛 문화의 맥이 끊어질 게 뻔하다"며 "현실적으로는 마땅한 방법이 없어 보이지만 그래도 소중한 문화를 지키기 위해 머리를 맞대고 방법을 찾아야 할 때"라고 말했다.
/박광희기자 khpark@hk.co.kr
사진 박서강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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