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일 태풍 '루사'의 악몽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강원 삼척시 미로면 하정리. 육군 철벽부대 하준호(21) 상병은 동료 부대원 150여명과 함께 꼬박 12시간을 쓰레기와 씨름했다. 굵은 땀방울이 콧등을 타고 흐르고 오물과 폐사가축의 썩는 냄새가 속을 뒤집어 놓았다. 녹색 상의는 땀과 흙탕물에 찌들어 아예 누런 빛깔마저 띤다. 하지만 하 상병은 힘들지 않느냐는 질문에 당차게 되묻는다. "보금자리도 잃어버린 수재민들 앞에서 힘들다는 소리를 어떻게 하겠습니까."
▶이곳은 총성 없는 전쟁터
하 상병 소속 부대원들은 수해지역을 찾아 매일 아침 7시면 부대를 나선다. 도로 유실로 30분 이상 산길을 걸어야 닿을 수 있는 지역이 대부분. 부대에서 직접 점심을 날라 먹으며 1일 삼척에서 시작해 강원도 일대를 찾아다닌지 벌써 6일째. 저녁 6시가 귀대 시간이지만 퀭한 눈의 수재민과 태산 같이 쌓인 일거리를 뒤로 하기가 쉽지 않다. 밤 9시가 되어서야 겨우 일자리를 털고 일어서 다시 30여분 산길을 되짚어 막사에 지친 몸을 누이기가 일쑤다. "제대로 씻지 못해 피부병에 시달리는 병사들이 늘어나는 것이 걱정입니다." 병사들을 인솔한 김동호 중사의 얘기다.
이날 경북 김천시 지례면에서도 해병대 1사단 소속 장병 350여명이 삽과 손수레로 길을 내고 침수가옥을 복구하느라 비지땀을 쏟고 있었다. 경북 일대를 돌며 6일째 이어진 강행군에 탈진할 지경이지만 권영호(22) 상병은 "집 전체가 흙더미에 깔린 할머니의 시름겨운 표정이 떠올라 도저히 누워있을 수 없었다"고 말했다.
충북 영동군 영동읍에는 특전사 흑표부대 장병 500여명이 5일부터 아예 부대 전체를 옮겨왔다. 영동군민운동장에 임시막사를 설치한 흑표부대는 일대 재해지역 복구작업에 전병력이 투입됐다.
태풍 루사가 할퀴고 간 전국 400여 재해지역. 푸른제복의 군인들은 그렇게 총성없는 수해와의 전쟁을 벌이고 있다.
▶수해복구 최전선에 선 군인들
총 대신 삽을 든 장병들은 수해복구 전쟁의 주력(主力)이자, 최정예다. 이들은 일반 자원봉사자들이 기피하는 오물처리 도로복구 등에 집중투입된다.
국방부에 따르면 육군 7만5,000여명을 포함해 연병력 17만3,000여명과 중장비 1,950여대가 동원돼 1996년 강릉 무장공비 사건 이후 최대규모의 '군사작전'이 벌어지고 있다. 작전기한은 완전복구때 까지다.
수마와의 전쟁 중에 숨지거나 다친 장병도 나와 주위의 눈시울을 적시게 하고 있다. 1일 김영곤(29) 대위가 폭우로 고립된 노인을 구하려 물에 뛰어들었다가 실종된 뒤 숨진채 발견됐다.
강원 동해시 부곡동 이재민 정은희(29)씨는 "신세대 군인들이 묵묵히 흘리는 땀방울을 보면 아름답다는 표현밖에 떠오르지 않는다"고 말했다.
/영동=한덕동기자 ddhan@hk.co.kr 김천=전준호기자 jhhun@hk.co.kr
이동훈기자 dhlee@hk.co.kr 강릉=김기철기자 kimi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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