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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와 현장 / 태풍 "루사"에 멍든 農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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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와 현장 / 태풍 "루사"에 멍든 農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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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09.0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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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확 코앞에 두고…"올 농사 끝장났다""이젠 입에 풀칠할 일이 걱정이에요." 태풍 '루사'가 농작물에도 큰 상처를 남기면서 '농작물 대란'의 후폭풍이 몰려오고 있다. 국내 배 주산지인 전남 나주, 포도 주산지인 충북 영동, 사과 주산지인 청송 등 경북과 전남 곡성 등 전국의 들녁에선 '멍든 농심(農心)'에서 터져나오는 탄식이 하늘을 찌르고 있다. 추석대목을 앞둔 유숙기(乳熟期·벼알이 익는 시기)에 직격탄을 맞은 쌀농사나 과수재배 농민들은 "올 농사는 끝장났다"며 "이젠 하늘도 농촌을 버리는 것 같다"고 긴 한숨을 내쉬고 있다.

◆찢기고 땅에 떨어진 農心

예년 같으면 탐스럽게 익은 배를 출하할 시기인 요즘 전남 나주지역 과수원에서는 땅에 떨어진 배를 치우느라 농민들의 얼굴에 수심이 가득하다.

올 봄 저온현상과 황사피해로 열매가 맺는 비율인 착과율이 예년의 60%수준에 불과하던 터에 태풍까지 몰아쳐 나무에 달려있던 배의 10개중 9개 정도가 떨어졌다. 전체 나주배 재배면적 2,976㏊(3,603개 농가) 가운데 93%인 2,763㏊에서 낙과(落果)피해가 발생, 매년 7만여톤에 이르던 나주배 생산량이 올해는 7분의 1 수준인 1만여톤으로 줄어들 전망이다.

전국 생산량의 11%를 생산하고 있는 포도 주산지인 충북 영동지역 농민들도 이번 수해로 회복불능 상태다. 수확기에 수해를 입은 조생종(캠밸어리)은 포도알이 떨어지거나 갈라져 출하를 아예 포기할 수 밖에 없기 때문. 만생종(세레단)도 막 익기 시작한 열매가 물을 너무 많이 먹어 상품가치가 크게 떨어졌고 황간·매곡·상촌·용화면 지역의 포도밭 가운데 20%는 아예 매몰돼 포도나무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이 지역에서는 예년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는 4만톤만 정도만 출하될 것으로 예상된다.

국내 사과 생산의 60%나 차지하는 경북 지역에서도 사과 재배단지 1만7000㏊ 가운데 30% 가까운 4,709㏊에서 낙과 피해가 났다. 나머지 지역에서도 밤이나 감 등 과일은 물론 고추·배추·오이·가지 등 채소류와 인삼·버섯 농가에서도 침수 피해가 속출하고 있다.

◆보상은 쥐꼬리…생계 막막

농민들을 가장 아프게 하는 것은 자식이나 마찬가지인 벼가 물에 잠기거나 쓰러진 피해. 농경지 피해가 가장 심각한 전남 지역은 전체 농경지 21만3000㏊ 가운데 22%가 물에 잠기거나 쓰러지고 벼가 검게 변하거나 하얗게 탈색되는 흑수·백수현상이 나타나 지난해에 비해 20∼30% 수확량이 줄어들 것으로 우려되고 있다.

특히 낙동강 인근 들녁에서는 침수된 뒤 3일이 지나서야 물이 빠진데다 일손 부족으로 쓰러진 벼를 일으켜 세우지 못해 벼논에서 아예 새싹이 돋아나고 있을 정도다. 이처럼 엄청난 피해로 농민들은 올 농사를 사실상 포기해야 하는데도 벼나 낙과피해에 대한 정부의 보상은 '쥐꼬리'여서 농민들은 살길이 막막하기만 하다.

정부는 자연재해법상 '재해가 발생할 경우 피해농작물에 대한 직접보상 규정이 없다'는 이유로 피해에 따른 농약대와 종자 및 비료값 지원만 하기 때문이다. 충남 천안시 병천면 매송리에서 12년째 7,000평의 배 과수원과 벼농사를 짓고 있는 한창섭(韓昶燮·50)씨는 "이번 태풍으로 예년 소득의 20%도 올리지 못할 것 같다"며 "애들 학비는 물론이고 영농자금 대출금을 어떻게 갚아야 할지 모르겠다"고 탄식을 쏟아냈다.

◆농작물 가격 폭등 조짐

농작물 피해로 벌써부터 가격이 치솟고 유통업체들은 추석물량 확보에 비상이 걸린 상태다. 광주지역 백화점들은 나주배 계약농가의 피해가 극심해 당초 예정물량 확보가 어려워지자 공급처를 타 지역으로 돌리는 등 대응책 마련에 고심하고 있다.

농림부 관계자는 "이번 농작물의 가격 상승은 예년과 같이 장마 뒤끝에 출하가 제때 안돼 일시적으로 오르는 것이 아니라 생산량 자체의 감소에 의한 것이어서 올 가을 '농작물 대란'이 우려된다"고 말했다.

/황양준기자 naigero@hk.co.kr

영동=한덕동기자 ddhan@hk.co.kr

나주=안경호기자 khan@hk.co.kr

천안=이준호기자 junhol@hk.co.kr

■농작물값 폭등…호박 작년의 4배

지난달 집중호우와 태풍 '루사'의 영향으로 배추, 상추, 호박 등 채소류 가격이 폭등세를 보이고 있다.

5일 서울 가락동농수산물시장에 따르면 이날 배추 도매가격은 5톤 트럭당 541만 5,000원으로 지난해(365만원) 보다 48% 올랐고, 무는 5톤당 483만 5,000원으로 64% 급등했다.

상추(4㎏)와 오이(50개)의 경우 각각 2만 450원과 1만 8,500원으로 지난해 가격보다 145%, 164%나 상승한 상태. 특히 피해가 심했던 호박은 2만 6,000원으로 지난해 가격 6,500원보다 무려 300% 비싸다.

이 밖의 채소류도 가격대가 예년에 비해 전체적으로 20% 이상 상승했다.

과일은 사과가 가장 큰 폭의 가격 상승세를 보이고 있다. 사과 아오리 15㎏당 지난해 2만 3,000만원이던 것이 이날은 3만 1,500원에 가격대가 형성돼 37%나 올랐다. 또 밤은 40㎏에 16만원으로 78%나 폭등한 상태.

태풍으로 인한 낙과로 큰 폭의 가격 상승이 예상됐던 배는 아직 예년 수준을 유지하고 있지만 추석이 다가오면서 가격이 크게 오를 것으로 전망된다.

포도 대추 등 다른 과일류와 산지의 쌀, 소, 돼지의 가격은 큰 변화가 없었다.

가락동농수산물시장 관계자는 "태풍 직후 4,800톤이던 청과물 반입량이 오늘은 6,300톤으로 평소 수준(6,000톤)을 회복하고 있어 날씨만 좋아지면 추석 전후로는 안정세를 유지할 수 있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고찬유기자 jutdae@hk.co.kr

■"내년·내후년이 더 걱정입니다" 나주서 배농사 짓는 권호상씨

"일년에 한번 짓는 배 농사를 몽땅 망쳤으니…. 그저 막막할 뿐입니다."

태풍 '루사'가 몰아치면서 배밭이 온통 쑥대밭이 된 권호상(權虎相·55·전남 나주시 봉황면·사진)씨. 나주배연구협의회장이기도 한 권씨는 5일 진흙밭에서 뒹구는 배를 움켜쥔 채 "배는 내 자식이나 다름없는데…. 이젠 농사에 사표를 내야 할 것 같다"면서 참담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권씨의 배농사 경력은 올해로 27년째. 평년에는 배 재배만으로 1억원 정도의 소득을 올리곤 했다. 지난해에는 8,000평의 배 과수원에서 5,000상자(15㎏) 이상을 생산했다. 그러나 올해는 4월 개화기에 닥친 냉해와 황사에 이어 이번 태풍으로 90% 가량의 배가 떨어져 수확량이 평년의 10%에도 못 미칠 형편이다.

당연히 올 농사 적자는 불 보듯 뻔하다. 배 재배에 들어간 비용은 농약 1,000만원, 퇴비 700만원, 인건비 800만원, 자재대금 600만원 등 줄잡아 3,500여만원. 수확한 배를 다 팔아도 1,000만원 정도에 그치게 돼 권씨의 시름은 깊어만 가고 있다.

"4,000평 논의 벼는 다행히 수해를 입지 않았지만 출수기 때 심한 비바람이 불어 역시 수확이 20∼30% 감소할 것 같아요." 권씨는 "8명의 가족 식량을 하고 나면 두 아들 대학 등록금도 보태지 못할 것 같다"면서 눈시울을 붉혔다.

권씨는 내년, 그리고 그 다음해가 더 걱정이다. 권씨는 "망친 농사를 회복하려면 3∼4년은 족히 걸린다"면서 "일시적인 지원책 보다는 농민들이 자리잡을 수 있을 때까지 장기적으로 지원해주어야 한다"고 주문했다.

그는 경황이 없는 처지지만 나주배연구협의회장 답게 제도적인 문제점도 조목조목 지적했다. "올해 초 농작물 피해 보험에 가입하려고 했으나 연간 800만원에 달하는 보험료 때문에 엄두도 못 냈어요. 농민 보다는 보험사 위주로 된 약관은 시정되어야 합니다." 망가진 배 밭을 세밀하게 점검하면서 둘러 본 권씨는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찾고 있었다.

/광주=김종구기자 sor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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