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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문학을 하는가](25)소설가 김원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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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문학을 하는가](25)소설가 김원우

입력
2002.09.0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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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일컫듯이 인체가 소우주라면 소설의 세계도 언어제도적 유기체로서의 그 위상만큼은 그에 버금간다. 모든 유기체가 대체로 그렇듯이 소설도 사회적·역사적 문맥 안에서만 그 지위를 확보한다. 그것이 언어활동과 생활세계라는 두 개의 본질적인 재료로 축조되어 있음은 주지의 사실인데, 그 이성적 조작마저도 두 재료의 사회성 및 역사성에 톡톡히 기대고 있어서 그렇다.더불어 간추린다면 생활세계도 인간만의 정신적 교감 능력인 초현실적·반자연적 감응계와 온갖 자질구레한 육체적 활동 능력인 현실적·물리적 반응계로 나누어진다. 전자는 모든 욕망·희원의 총체인 상상적 세계의 추상적 구현으로 나아가고, 후자는 비속할 수밖에 없는 세속계의 사실적 재현으로 줄달음친다. 그것들의 조화로운 조합이 핍진성과 개연성을 얼마나 파지하고 있느냐에 따라서 어떤 유기체의 온당한 시가가 매겨진다. 그럴 수밖에 없음은 우선 둘 중 어느 한쪽이 지나치게 지면을 과점하면 인간으로서의 위엄을 거느리는 인물이 없어지거나 짐승으로 주저앉으려는 사람들의 작태만이 질펀하게 깔리고 말기 때문이다.

달리 말하면 어떤 환상의 추상화도 너무나 막강한 현실에 대한 한낱 가역반응에 지나지 않으므로 인간적 모듬살이의 여러 실천적 면면과 동떨어진 그런 국면은 유치한 원망의 속없는 토로에 불과하다. 그 반대로 어떤 현실의 사실화도 인간의 제반 의식과 행위의 역동적 반영에 불과하므로 개개인의 별난 일상과 생애의 선별적 조감은 장기 지속적인 생활양식과 생활 표현들의 뻔한 고식적 조작일 뿐이다. 따라서 여러 사건들과 그것에의 분별을 강제하는 주관적·사실적 이야기의 집합 같은 소설이 있는가 하면, 심성과 감성의 자상한 세목화를 겨냥하는 상징적·낭만적 에세이류의 소설도 있을 수 있다(어느쪽 소설의 실제 가격이 상대적으로 더 값싼 지에 대한 판단은 전적으로 임의적일 수밖에 없다).

사람이 언제부터 윤리적인 동물로 부상했는지를 간단히 말하기는 어렵지만 소설쓰기도 인간의 모든 수고가 그렇듯이 윤리적인 행위임은 틀림없을 것이다. 특히나 다들 앞다투어 말하는 대로 탈근대화를 지향하는 오늘날, 다종다양한 소설들을 한껏 대량 생산해내고 있는 나라들의 생산자 및 그 소비자들에게는 반드시 나름의 윤리관을 요구하고 있다. 모든 상품의 다른 이름이 쓰레기이듯이 소설처럼 그것이 없이도 일상생활을 영위하는 데는 하등의 지장이 없는 생산품일수록 그것의 개인별 효용도를 따지기도 무색해지기 때문에 그렇다. 당연하게도 이 대목에서 저속한 수단과 고상한 목적이 제멋대로 혼선을 빚고, 대중매체들이 그 수상한 도착증세를 부추기는 현장을 논란거리로 삼을 수 있을 텐데, 그 밑바닥에는 작가 일반의 윤리의식이 내면화되어 있지 않다는 생생한 결함을 수월하게 지적할 수 있을 뿐이다.

창작행위에 따르는 윤리의식 제반을 여러 갈래로 나누어 말하려면 끝도 없지만, 그것의 요체는 결국 모순덩어리로서의 세계상 전반에 대한 진지한 관심과 그런 엉망의 현상 일반을 주목하는 숱한 담론 일체에 대한 실천적 대응이다. 곧 오늘날의 무소불위한 전략적 국가 권력의 득세, 지식의 대중화로 말미암은 지나친 온정주의 내지는 간섭주의를 선동하는 여러 사회적 제도 및 가족제도의 구조화 따위가 구성원들마다에 얼마나 유위하게 작동하고 있으며, 그런 난해한 여러 문명적 코드들에 대한 근원적 해석에의 모색이다(여기서 하나의 장르로서 문학과 학문 중 어느쪽이 더 적절한 호소력과 명징한 관찰력을 누리는지 살펴볼 만하며, 이런 화두는 소설의 장래의 어떤 꼴에 대한 시사로 기능하고 있다. 이를테면 역사학의 용량을 몇배나 불려놓고 있는 최근 서구의 미시사·여성사·심성사·일상사·노동사 등등에서 거둔 괄목할 만한 업적들이 소설보다 훨씬 재미있을 뿐더러 그 서사적 문맥조차 소설 일반의 피상성을 주도면밀하게 극복하며, 소설의 쓸데없는 과장성마저도 엄격하게 제한하고 있음은 주목에 값한다. 또한 그런 의미에서도 역사학자들의 직업적 윤리의식은 작가들의 천박한 그것보다 몇 배나 양질임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덧붙인다면 움베르토 에코의 몇몇 작품들은 역사학의 그런 성숙에 대한 착목이며, 그것의 낭만적 세속화를 기획한 나머지 거둔 나름의 활수한 소설적 용도화인데 그 기획력이 그만의 독보적 역량도 아니다).

만화나 영화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특유의 과장벽을 소설의 단조로운 서술벽과 견주면 어떤 작가라도 다소 안도하는 한편 절망하게 된다. 그 터무니없는 과장이 화면마다에 가득한 실적 자체가 현실과는 너무나 동떨어져 있다는 자각 때문에라도 그렇고, 각각의 장르적 특성을 논외로 치더라도 소설의 서사적 기술 행위가 동영상의 그 유치성·찰나성보다는 한결 나은 인간의 섬세한 심성에 다가가려는 노력이라고 여겨지기 때문에 그렇다. 그러나 바로 그런 서로의 탁월한 기능의 끝없는 시위 때문에 소설은 동영상의 투명한 호소력을 따라갈 수 없고, 자연스럽게도 소설의 역할·입지·영속성 따위는 점점 더 구차스럽고 보잘 것이 없다는 장르적 숙명감을 되새기게 되고 만다. 크게 말해서 경험의 보편적 양식화라는 측면에서는 소설이나 영화나 그 최종적 성취의 목표는 거의 같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주요 등장인물들의 의상에서 표정에 이르기까지 얼마쯤은 눈속임을 전제로 해야만 그 흥행성이 보장된다는 특성 때문에라도 영화는 관객들로 하여금 유치한 착각을 사주한다.

물론 소설도 그런 꾀바른 장치술을 동원하지만 영화처럼 무제한으로 활용할 수는 없다(영화적 언어와 소설적 언어의 그 질감 비교 자체는 무리이며, 소비적 측면에서도 두쪽의 정서의 정교화 과정은 유비의 대상이 아니다). 요컨대 그 충실한 인공적 세목들이 즉각적으로 불러일으키는 사실감 때문에라도 어떤 은유적 기능이 희박하다는 영화의 양식적 결함에 반해 소설은 언어 자체의 정치한 의미화가 내장하고 있는 은유의 힘을 상대적으로 많이 확보한다(어떤 풍속이나 광경의 의미화는 근본적으로 언어의 은유적 기능에 맡길 수밖에 없고, 거꾸로 그런 정서적 기호화가 여러 의미에서의 문화적 수준의 고양과 그 내실화를 채근하고 보장한다. 한글 언어권이 안고 있는 문화적·문명적 콘텍스트의 부실은 사실상 그런 의미화에의 노력이 부족하기 때문일 것이다).

어떤 소설의 성취 정도를 분석, 해설, 평가할 수 있는 척도는 많다. 사회적 제반 제도의 근대성 미달(미개사회에 대한 투정 많은 계몽성을 시위한다), 남은 물론이고 자신에 대한 점잖은 배려를 행동으로 실천하지 않는 반거들충이 인물들의 횡행(활극을 조장한다), 다채로운 수사적 실험이랄 수밖에 없는 형식 변주에의 태무심(내용보다 형식에의 변화 추구야말로 어떤 독창적 세계관의 가능성을 열어놓는다) 등등이 어떤 소설의 지배적 정조로 떠올라 있는 한 그것은 이미 현대소설의 진면목과는 거리가 멀다. 차라리 그런저런 고질적·상투적 제도화로 줄달음치고 있는 한글 언어권만의 이상한 글짓기 현상 일체에 적대적인 글쓰기 행위야말로 가장 시급한 소설적 화두이자 소임일 수 있다.

사실상 오늘날 숱하게 확대 재생산해내고 있는 이야기들은 이렇다 할 정보적 가치가 없다. (근대사회가 확실하게 활착시킨 일상의 권력화가 어떤 정보라도 그 유치성의 정도를 단숨에 발겨낸다. 달리 말하면 어떤 싱거운 정보나 각자의 무책임한 환상조차 고만고만할 수밖에 없는 사회적 현상 자체가 근대의 속성 중 하나이다. 다만 그런 현상 일체의 뿌리 깊은 구조화에 대한 남다른 분별과 찬찬한 주목의 상징화 내지는 은유화가 있을 뿐이다. 바로 그런 각별한 정서와 공감의 지평 확대는 필경 주변문화와 중심문화의 상대적 이해폭을 넓히는 경지로 들어가게 마련이며, 그런 일련의 겸손한 세계이해야말로 소설의 덕목일 수 있다. 소설이 아무리 비천한 장르일망정 그 최상치의 구현, 곧 세계 해석이라는 난제 앞에서 몸을 사리면 통속화의 지름길로 빠져들 수밖에 없다.)

늘 보고 겪는 바대로 세상과 세상살이는 아무리 좋게 봐준다 하더라도 유치하기 짝이 없다. 그러나 아무리 과소평가하더라도 소설은 오늘날의 엉터리 세상보다는 진짜에 가깝고, 그런 정직한 번역은 세상을 힘 닿는 데까지 바루어 놓으려는 인간적 노력의 하나일 수 있다. 소설의 제값 찾기에 따르는 작금의 위기의식은 그것의 본질적 방향감각이 실종되었거나 왜곡되어버린 과도기적 현상이라기보다는 늘 자기갱신에의 몸부림에 게으름을 피울 수 없는 한 예술 양식의 암중모색기라고 이해해야 타당할 것이다.

● 연보

1947년 경남 진영 출생

1973년 경북대 영문과 졸업

1977년 중편소설 '임지(任地)'가 '한국문학' 신인상에 당선 등단

1999년∼현재 계명대 문예창작과 교수

소설집 '무기질 청년' '인생 공부' '장애물 경주' '세자매 이야기' '아득한 나날' '벌거벗은 마음' '안팎에서 길들이기' '객수산록' 장편 '짐승의 시간' '가슴없는 세상' '모노가미의 새 얼굴' '일인극 가족' 등 한국일보문학상(1983) 동인문학상(1991) 동서문학상(1998) 등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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