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 광산구 월계동 주택단지의 금싸라기 땅 4,300평에는 특이한 공원이 조성돼 있다. 조망 좋은 구릉에 만들어진 흔한 공원이 아니다. 평지에서 계단을 타고 2m 이상 밑으로 내려가야 하고 흔한 운동기구 하나 없다. 이상하게 생긴 작은 동산 2개가 자리잡고 있을 뿐이다.이 작은 동산들은 1,500년쯤 전에 만들어진 무덤들이다. 당시 이 지역에서 흔히 쓰이던 옹관묘가 아니라 멀리 일본에서 성행하고 있던 전방후원분(前方後圓墳)과 똑같은 무덤이다. 한쪽은 네모지고 다른 쪽은 둥그런 형태의 흙무덤이다. 그러나 후세 사람들은 그것을 구릉이라고 생각해서 거기에 기대어 집을 짓고 마을을 이뤄 살았다. 그 구릉이 우리 전통 악기인 장고를 닮았다고 해서 마을 이름을 '장고촌'이라고 했다.
오랜 세월 잊혀졌던 장고촌의 이 구릉이 어느날 갑자기 주목을 받게 되었다. '광주 첨단과학산업단지' 개발이 확정됨에 따라 1993년에 이루어진 시굴(試掘)조사를 통해 이 구릉이 전형적인 일본식 고분임이 확인되었기 때문이다. 몇 년 전에 일본의 역사왜곡에 대해 거국적인 성토가 있었던 터라 일반인들도 일본식의 이 무덤이 어찌하여 영산강 상류 평야지대인 광주 월계동에 자리잡고 있는가에 대해 큰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당장 급한 것은 이 지역을 보존하는 일이었다. 개발 계획에 따르면 단지 안에서 가장 큰 폭 30m의 도로가 이 곳을 지나도록 돼 있어 무덤을 보존하려면 마스터플랜의 전면 수정이 불가피했다.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이 일대 4,300평이 공원지역으로 변경되어 무덤들이 제 자리에 보존될 수 있었다.
그 후 추가 발굴과 복원이 이뤄져 지금은 수많은 국내외 학자들과 일반인들을 맞고 있는데 하나같이 무덤의 주인공에 대해 궁금해 한다. 일본과 연결되어 있던 현지 마한의 세력자라는 주장을 비롯하여 백제가 영산강 유역권의 마한 세력을 제압하기 위해 끌어들인 일본 세력자라는 주장, 일본에서 파견되어 교역과 같은 업무에 종사한 사람이라는 주장, 혼인과 같은 인적 교류나 정치적인 이유로 망명해 온 사람일 가능성 등 연구자마다 다른 견해를 내고 있다. 필자는 이러한 무덤들이 원래부터 토착세력자가 있었다는 증거를 찾아보기 어려운 변두리 지역에만 1∼2기씩 존재하고, 당시 일본은 각 지역이 야마토(大和)정권에 통합되는 과정에서 커다란 정치적 소용돌이에 휩싸여 있었다는 점 등으로 미뤄 마한권에 연고를 가진 일본인들이 망명해 들어와 여생을 마쳤던 증거일 가능성이 가장 높다고 보고 있다.
앞으로도 이 문제는 계속 논의가 되겠지만 5세기 말∼6세기 초에 해당하는 이런 유형의 무덤들이 영산강 유역권에만 존재한다는 사실을 통해 4세기 중엽 백제 근초고왕대에 영산강 유역권의 마지막 마한세력이 백제에 병합되었다고 보는 기존의 통설은 재고돼야 한다는데 대해서는 많은 연구자들이 인식을 같이 하고 있다.
이 무덤들과 관련된 역사적 사실은 하나이고, 무덤들이 처해 있는 고고학적 상황도 하나일 뿐이지만 이렇게 다양한 견해가 제기되는 것은 당시의 국제 정세가 그만큼 복잡했음을 말해준다. 더욱이 그것은 과거의 일만이 아니다. '임나일본부'와 같이 지금은 잠복해있는 일본의 역사왜곡이 언제든지 다시 고개를 들 소지가 여전히 남아있기 때문이다.
임영진 전남대 인류학과 교수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