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나의 이력서]영원한 청년 이만섭(34)재선의원 시절 ③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나의 이력서]영원한 청년 이만섭(34)재선의원 시절 ③

입력
2002.09.05 00:00
0 0

3선 개헌을 두고 박정희(朴正熙) 대통령과 치열하게 부딪쳤던 얘기는 전에 자세히 했다. 또 김형욱(金炯旭) 중앙정보부장이나 이후락(李厚洛) 청와대 비서실장과 도저히 화해할 수 없는 사이가 된 것도 그랬다. 김 부장과 이 실장은 권력 남용의 장본인으로 지목하며 퇴진을 요구한 나를 좋게 여길 리가 없었다.3선 개헌 국민투표 후 박 대통령은 두 사람을 조치하겠다는 약속을 지키긴 했다. 그러나 7대 대통령 선거를 4개월 앞둔 1970년 12월 이후락씨가 중앙정보부장으로 복귀했다. 여전히 국민은 그를 못마땅하게 여겼지만 대선을 염두에 둔 박 대통령은 그가 필요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의 복귀는 나에게는 결코 달갑지 않은 일이었다.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진 중앙정보부장의 힘으로 보아 그는 마음만 먹으면 내가 감당할 수 없는 보복을 할 수 있었다.

이듬해인 71년 4월의 대선은 과거 양상과는 많이 달랐다. 야당인 신민당에서는 김영삼(金泳三) 김대중(金大中) 이철승(李哲承)씨 등이 '40대 기수론'을 들고 나와 대통령 후보 경선에 나섰다. 여기에서 승리한 김대중씨가 박 대통령의 경쟁자로 나섰다. 3선 개헌 뒤의 대선이었기 때문에 그의 도전은 만만하지 않았다. 박 대통령이 선거 중반 "이번이 마지막이니 한번만 더 지지해 달라"고 호소할 정도였다.

그러나 4월27일의 대통령 선거 결과는 박 대통령이 100여 만표를 이긴 것으로 드러났다. 재야와 학생들의 부정선거 규탄 시위가 또 다시 격렬하게 벌어졌다. 야당은 4·27 대선의 무효화와 5·25 총선 거부론을 들고 나왔다. 야당은 한 동안 논란 끝에 "총선거의 공명성이 보장되지 않으면 전원이 후보를 사퇴한다"는 조건 아래 총선거에 참여하기로 했다.

8대 총선은 재선 의원인 나에게는 아주 중요했다. 앞으로 다선 중진 의원으로 설 수 있느냐의 갈림길이었다. 여건은 전혀 좋지 않았다. 공화당 공천을 받을 수 있을지조차 자신이 없었다. 3선 개헌 반대로 박 대통령과의 사이는 틀어질 대로 틀어진 상태인 데다 이후락 부장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나를 공천에서 탈락시키려 할 게 뻔했다.

당시 백남억(白南檍) 공화당 의장이 나서지 않았다면 내 예측은 적중했을 것이다. 백 의장은 나를 비롯한 3선 개헌 반대자들의 공천을 박 대통령에게 건의했다. 박 대통령의 결단으로 나는 물론 양순직(楊淳稙) 예춘호(芮春浩) 등 제명 의원, 삭발까지 했던 정간용(鄭幹鎔) 의원까지 함께 공화당 공천을 받을 수 있었다.

선거전이 본격화하자 이상한 일들이 잇따라 일어났다. 내 선거구인 대구 중구에 있던 고속버스 터미널이 내 반대에도 불구하고 선거 기간에 동대구 쪽으로 이전됐다. 또 선거기간에 과중한 세금 고지서가 유독 나의 선거구민들에게 집중적으로 날아들었다. 당시 대구에는 자전거를 타고 다니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이들을 교통 위반이라고 장시간 잡아 두거나 연행하는 일도 잇따랐다. 하나같이 여당 후보에게 불리한 일들이었다.

나로서는 이후락 부장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심증만 있을 뿐 뚜렷한 증거가 없었다. 그런데 투표를 일주일 쯤 앞두고 내 선거구의 구청장이 나를 찾아 왔다. "죄송한 말씀을 드리러 왔습니다. 여당이라고 절대 봐 줘서는 안된다는 지시가 내려 왔습니다. 투표 때나 개표 때 대구에 없더라도 양해해 주십시오." 짐작했던 대로 이 부장이 나의 낙선을 노리고 선거에 강하게 개입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 부장의 이런 선거 방해 공작을 무릅쓰고 최선을 다했지만 역시 힘에 부쳤다. 결국 나는 신민당 후보에게 지고 말았다. 양순직 예춘호 후보도 함께 떨어졌다. 억울했지만 결과를 받아 들여야만 했다. 1963년 11월 6대 국회에 등원한 뒤 6·7대에 걸쳐 나름대로 국가를 위해 일해 왔다고 자부했지만 이 부장의 집요한 보복에는 도리가 없었다.

나는 대학졸업 후 처음으로 실업자가 됐다.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