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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력서]영원한 청년 이만섭(33)재선의원 시절 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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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력서]영원한 청년 이만섭(33)재선의원 시절 ②

입력
2002.09.0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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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화당만으로 단독 개원, 오랜 파행을 겪은 7대 국회는 선거 169일 만인 1967년 11월29일 신민당이 등원을 결정, 가까스로 정상 궤도에 들어 섰다.이듬해에 접어 들자마자 대형 사건이 잇따라 터졌다. 1월21일 김신조(金新朝)를 비롯한 북한의 무장공비 31명이 청와대 뒷산까지 침투해 들어 와 경비병들과 총격전을 벌이는 충격적인 사건이 발생했다. 이틀 뒤에는 동해에서 작전 중이던 미군 함정 푸에블로호가 북한에 납치돼 원산만으로 끌려 갔다.

두 사건이 우리 사회에 미친 파장은 심각했다. 국민의 불안은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국민들은 정부 고위 공직자들의 무사안일을 질타했다. 국회가 이를 그냥 지켜볼 수는 없었다.

국회는 1월31일 임시국회를 열어 1·21 사태와 푸에블로호 사건을 추궁했다. 2월2일에는 대정부 질문이 있었다. 신민당에서는 유진오(兪鎭午) 총재가 직접 나섰고 여당에서는 내가 나섰다. 나는 중앙정보부의 전횡에 초점을 맞췄다.

"먼저 1·21 사태로 희생된 군경 유가족에게 애도의 뜻을 표합니다. 이번 사건은 고위 공직자들의 무사안일 때문입니다. 관계 국무위원은 마땅히 책임을 지고 자리에서 물러나야 합니다. 본 의원이 듣기로는 이런 엄청난 사건이 벌어지고 있는 동안에도 일부 장관들은 골프를 치고 있었다고 합니다. 공비들은 가는 곳마다 군 기관원을 사칭했고, 그 때마다 별 어려움 없이 검문을 통과했다는 점에 주목합니다. 이는 정보기관에 있는 사람들이 권력을 남용해 왔기에 기관원이라고 하면 아무도 손을 대지 못했던 사회 풍조를 공비들이 이용한 것입니다. 중앙정보부는 정치 사찰을 즉각 중지하고 대공 업무에만 전념해야 합니다…."

나중에 들었지만 김형욱(金炯旭) 중앙정보부장은 내 발언을 몹시 불쾌해 했다고 한다. 이후 3선 개헌 여부를 둘러 싸고 빚어진 나와 김 부장의 갈등(나의 이력서 5∼12회 참조)은 이 때 이미 싹트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5월에는 이른바 '복지회' 사건이 터졌다. 친(親) 김종필(金鍾泌)계인 김용태(金龍泰) 최영두(崔永斗) 의원 등이 공화당의 공조직과는 별도로 사회복지회라는 전국적 사조직을 만든 사건이다. 반(反) 김종필 세력은 이를 71년 대통령 선거에 대비한 친 김종필 세력의 정치적 포석으로 간주했다. 이에 따라 그 동안 물밑에서 끊이지 않았던 공화당내 주류와 비주류의 세력 다툼이 표면화하기 시작했다.

나는 김종필계가 너무 성급하게 움직인다는 느낌이 들었다. 대선 이듬해부터 후계 구도와 관련된 이야기가 나도는 것은 나라를 위해서도 바람직하지 않다는 게 내 생각이었다. 어쨌든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의 국정 수행에 지장을 줄 수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당시 나는 친 김종필계도 아니고 그렇다고 반 김종필계도 아니었다. 굳이 따지자면 3선 개헌 전까지는 박 대통령 직계라고 할 수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이 사실을 전해 들은 박 대통령은 격노했다. 취임한 지 1년이 지나지 않은 시점에 후계자 이야기가 나오는 것은 자신에 대한 도전이라고 여긴 때문이다. 박 대통령은 "용서할 수 없는 항명이니 주동자를 색출해 엄단하라"고 지시했다.

결국 5월25일 김용태 최영두 두 의원이 공화당에서 제명됐다. 이어서 30일에는 김종필 의장이 공화당 의장직과 국회의원직을 모두 사퇴하고 정계 은퇴를 선언했다. 박 대통령은 김 의장의 사퇴 소식을 보고 받고 이후락(李厚洛) 비서실장을 보내 번의를 권고했지만 김 의장은 이를 받아 들이지 않았다.

김 의장의 사퇴 의사 표명은 주류계의 동요를 불러 일으켰다. 김 의장을 지지하는 일부 지역에서는 동반 탈당계를 제출하기도 했다. 그러나 김 의장은 6월3일 고별 기자회견에서 "오래 전부터 생각한 일이며 다시 정계에 복귀할 생각은 없다"고 말했다.

박 대통령은 당원들의 반발 무마를 지시하고 6월4일 윤치영(尹致暎)씨를 당의장 서리에 임명했다. 당무위원의 일괄 사표도 반려했다. 복지회 사건으로 인한 주류 비주류의 갈등은 이렇게 겉으로는 봉합되는 듯했지만 1969년 정초부터 표면화한 3선 개헌을 놓고 다시 물위로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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