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천상병씨는 무직과 가난, 주벽으로 찌든 생활을 청산하고 40세가 넘어 늦장가를 들었다. 부인은 의정부의 한 셋방에 그를 남겨두고 서울 인사동의 카페 '귀천'으로 출근했다.부인은 아침마다 출근 전에 막걸리 두 병과 담배 한 갑을 방안에 챙겨 주었다. 천씨는 시간을 잘 계산하면서 막걸리를 나눠 마시고 담배를 피웠다. 부인이 돌아오기 전 너무 일찍 막걸리와 담배가 떨어지면, 야단도 맞을 뿐 아니라 심심하기 때문이었다. 천씨는 '천상 시인'이자 '천상 술꾼'이었다.
■ 인간의 정신을 온전하게 내버려 두지 않은 우리 현대 문학사는 많은 술꾼 시인을 배출할 수밖에 없었다. 변영로 김관식이 있었고, 취중 사고로 타계한 시인도 적지 않다. 술꾼 시인 계보를 잇는 고은씨가 최근 "시인 가운데 술꾼이 없다"고 개탄했다. 그는 한 문학지에서 "도잠, 이백, 두보는 중국문학의 근본에 술이 얼마나 깊이 관련되는가를 자랑한다. 시와 술이 혼연일체가 된 것이 그들 고대 서정의 광활한 세계였다"고 일갈했다.
■ 그 중 이백이 가장 대표적 술꾼일 듯하다. <…장풍 만리에 가을 기러기를 보내나니/ 이런 날 높은 누에 술 취하기 좋구나/…칼 뽑아 끊어도 물은 더욱 흐르고/ 술잔 들어 씻어내도 수심은 더욱 수심/ 남아로 이 세상에 뜻 맞지 않으니/ 내일은 관모 벗은 산발로 편주를 저으리> 이백이 친구를 전송하면서 지은 시의 부분이다. 시대와의 불화로 깊은 우수가 흐르고, 그 우수를 바탕으로 솟구치는 남아적 기상을 한껏 떨쳐 보이는 거장의 시다.
■ 시인과 소설가가 술을 덜 마시는 것이 외형상으로는 컴퓨터 문명 탓이기도 하다. 문인이 원고를 전해주는 절차가 생략되면서, 통음의 기회도 준 것이다. 그러나 고은씨는 "시의 위기를 외부에서 찾지 말기 바란다"고 충고한다. 그는 불취의 정신으로는 도저히 가 닿을 수 없는, 큰 정신과 정서의 나눔이 없는데 대한 시인적 성찰을 촉구하고 있다. 낭만과 진정성이 부재하는 메마른 시대를 울리는 노시인의 육성이 눈물겨운 바 있다.
/박래부 논설위원parkrb@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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