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풍 '루사'가 여름 뒤끝의 잠시 방심한 틈을 비집고 들어와 온 국토를 갈갈이 찢고 지나갔다. 용케 직격탄을 피한 서울과 수도권 주민들은 실감이 덜 할지 모르지만 이번에 태풍이 건드리고 간 지역은 거의 폐허가 됐다.지금까지 집계된 수치만 따져도 두고두고 끔찍했던 경험으로 회자되는 1959년의 '사라'나 87년의 '셀마'의 피해규모를 훌쩍 넘어섰을 정도다. 실로 모진 바람의 위력이다.
하지만 우리사회를 멍들게 하는 바람이 어찌 태풍뿐이겠는가. 아무리 큰 태풍이라도 발생에서 소멸까지의 수명은 짧으면 일주일, 길어야 한달이고 우리에게 직접 피해를 입히는 시간도 이틀 밤낮을 꼬박 넘기기 어렵다.
그런데도 한달 이상 끈질기게 불고 있을 뿐 아니라 앞으로 소멸되려면 얼마나 더 기다려야 할지 도무지 가늠되지 않는 바람이 있다. 그것도 오래 전 건듯 불었다가 다시 되돌아온 희한한 경로의 바람이다.
이른바 병풍(兵風)이다. 이뿐이랴. 세풍(稅風)도, 안풍(安風)도 잠시 잠복해 있을 뿐 계기만 있으면 언제든 부활할 조짐이다. 이런 사건들 이름에 '바람 풍'자가 붙여진 것은 왠지 우연같지 않아 보인다.
미국에서 건너온 관행이긴 하지만 원래 대형 스캔들이나 사건에는 어미에 '게이트'가 붙는 법이다. 닉슨 대통령을 사임시킨 워터게이트 사건 이후이다. 물론 워터게이트란 이름 자체도 그저 사건현장의 빌딩 이름일 뿐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게이트라고 하면 뭔가 구체적인 사건의 냄새를 풍긴다. 게다가 게이트란 게 어차피 드나들도록 열려있는 것이니, 언제 어떤 식으로든 그 곳을 통해 내부에 접근할 수 있으리라는 막연한 느낌도 준다.
실제로 진승현게이트니, 이용호게이트니, 정현준게이트니 하는 것들도 결말이 그다지 산뜻하지는 않았어도 어쨌든 가려졌던 실체의 일부라도 드러나 사법처리까지 이어졌다.
그러나 바람은 다르다. 애당초 바람이라는 것은 손에 잡히는 구체적인 감촉도 없거니와 진행 방향조차도 예측가능하지 않다.
그러니 어떤 사건에 일단 '풍'자가 붙여지면 속 시원하게 모습이 드러나기를 기대하는 것은 부질없는 일이 된다.
'풍'자가 붙으면 그때부터는 사안의 본질보다는 바람을 일으킨 의도와 효과 등 주변적인 것들이 더 중요한 문젯거리가 되기 십상이다.
이런 면에서 이번의 병풍도 앞으로 검찰이 어떤 식으로 결론을 내리든 간에 어차피 그 동기의 비순수성과 완강한 역풍으로 인해 허공에 한낱 먼지만 분분하게 날린 채 또다시 뭐가 뭔지 모르게 끝날 공산이 크다.
이렇게 보면 그 실체야 어떻든 병풍이란 것도 당초부터 '병역게이트' 쯤으로 이름이 붙여져야 했다. 그러면 가부간에 이미 결론이 내려졌거나 지금보다는 최소한 진상에 훨씬 가까이 다가가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우리를 상처내는 바람은 태풍만이 아니다. 좀처럼 잦아들 것 같지않은 이런저런 바람에 휘둘리며 다들 지쳐가고 있다.
이준희 사회부장 jun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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