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트막한 야산은 잡목으로 뒤덮였다. 언덕배기에 쓰러질 듯한 초가 한두 채가 키 큰 나무 뒤로 숨어있다. 산 밑으로는 맑은 개울물이 흐른다. 화폭 어디에도 기암절벽의 천하경승은 없다. 적요하다 못해 스산하고 황량하기까지 한 산야일 뿐이다. 시선을 화폭의 다른 쪽으로 돌리면 그제야 숨은듯 사람의 모습이 보인다. 나무짐을 지게에 진 채 허리를 꺾고 걸어가는 초부(樵夫), 황소에 등짐을 얹혀 이끌고 가는 농부, 혹은 머리에 인 함지박을 한 손으로 잡고 잰걸음을 놀리고 있는 촌부(村婦)이다. 너무나도 평범하고 소박한 우리 전래의 산촌 모습은 청전(靑田) 이상범(李象範·1897∼1972)의 그림에서 뚜렷한 실경을 얻었다.
별스러울 것 없는 이 땅의 산과 들, 거기 살아가는 사람의 모습이 청전의 붓질을 통해 보는 이의 가슴 깊숙한 곳에 붙박혀 버린다. 청전이 그리는 정경은 이 땅에 살아온 사람들의 핏속에서 이어져 내려온 것이고 살거나 보지 않았어도 본능에서 알 수 있는 한국인의 마음의 고향이다. 청전은 그 고향을 자신의 작품으로 우리에게 영원히 기억되게 했다.
올해는 청전의 30주기. 갤러리현대(02-734-6111∼3)가 6일부터 10월 6일까지 여는 '청전 이상범의 진경산수'전은 오랜만에 청전이 그려낸 한국적 자연의 미를 한자리에서 볼 수 있는 기회이다. 1950∼60년대 '산가청류(山家淸流)' '강상어락(江上漁樂)' '고원무림(高遠霧林)'등 대표작과 산골의 춘하추동 정경을 그린 전성기의 작품들이 50여 점 나온다. 97년 호암갤러리에서 열린 탄생 100주년 기념전 이래 5년만에 열리는 청전 그림의 대규모 전시회다.
이번 전시회에는 특히 기관·개인 소장품들로 그간 일반에 공개되지 않았던 작품들이 30여 점이나 포함됐다. 1940년대 전반기 작품으로 추정되는 '금강산 12승경' 12폭 병풍 그림이 최초로 공개된다. 48년에 두루마리에 그린 '전 적벽부(前 赤壁賦)' 와 '후 적벽부(後 赤壁賦)' 2점의 그림은 청전의 별세 직후 열린 추모 유작전람회 이후 30년 만에 볼 수 있게 됐다. 그림 상단에 소동파(蘇東坡)가 지은 '적벽부' 전문 약 1,000여 자를 써넣어 청전의 서법까지 알 수 있는 작품이다.
"예술에 선진, 후진이 있을 수 없는 법이다. 어떤 양식, 어떤 진실이 있을 뿐이다. 우리의 그림에는 우리의 분위기가, 우리의 공기가, 우리의 뼛골이 배어져야 한다. 감히 나는 훌륭한 그림을 그렸다고는 말할 수는 없지만 우리적인 그림을 그렸다고는 생각한다. 내가 그린 산수나 초가집들은 우리나라가 아니면 찾아볼 수가 없는 세계이다."
청전은 만년에 남긴 이 말처럼 우리의 뼛골이 밴 그림을 그리려 했다. 중국의 남종 산수화를 그대로 모사하고 있었던 전통화단의 화풍에서 벗어나기 위해 독자적 운필과 준법을 모색한다. 이른바 미점법(米點法)이 그것이다. 청전 예술의 황금기라고 보는 1950년대 후반에서 1960년대에 이르는 기간의 작품들에서 이는 완성된다.
화면 가득 자욱히 안개가 낀 듯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무수한 필획을 가해 실감을 살리는 이 기법은 '잘잘한 필촉과 점획의 몰골'(이구열) '때로는 스스럼없이 짧게 끊어치고, 때로는 붓을 마구 비벼댄 먹자국이 파편처럼 깨진'(유홍준) 화법이다. 청전이 거친듯하면서도 속도감 있게 그린 평범한 나뭇가지, 무성한 억새, 맑은 시냇물 한 자락은 이 필법으로 싱싱하게 살아난다.
오광수 국립현대미술관장은 "청전 예술에서 느껴지는 영원성 내지 귀의감은 하나의 풍경이 화면 자체로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화면을 뚫고 영원으로 지속되는 심리적인 원근을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라며 그를 영원한 한국미의 전형을 완성한 겸재(謙齋) 정선(鄭敾) 이후의 최대의 작가라 서슴없이 말한다.
"머잖아 우리 세대가 가고 새로운 세대의 예술인들이 나타나서 창작활동을 하며 민족문화를 계승하겠지. 그런데 그때도 이런 산을, 나무들을 묵선으로 그리게 될까. 과연 어떨까. 이 수묵의 전통을 이어갈 것인가, 아니면 타 문화에로 동화될 것인가." 청전이 남긴 이 말은 그의 30주기에 더 절실하다.
/하종오기자 joha@hk.co.kr
● 청전 이상범은 누구
청전은 1897년 충남 공주에서 태어났다. 출생 이듬해 부친을 잃고 9살 때 가족과 서울로 온다. "내 나이 18세 가난에 시달리고 세상살이의 고달픔에 지쳐서 서화미술회의 문을 밀게 되는 일이 없었던들 나는 기록할 아무 것도 없는 촌부로 생을 끝마쳤을 것이다." 보통학교 4학년을 마치고 1914년 서화미술회 강습소에 들어간 그는 조선의 마지막 대화가들인 심전(心田) 안중식(安中植)과 소림(小琳) 조석진(趙錫晉)을 스승으로 만난다. "하나의 산, 하나의 나무를 스승에 경지에 이르게 되기까지 반복, 또 반복"하는 수련과 수양의 교육이었다. 1921년 제1회 서화협회전으로 화단에 나온 이후 청전은 다음해 열린 제1회 조선미술전람회(선전) 출품 이후 연 10회 입선과 특선을 차지한다. 서화미술회 동문 노수현 및 이용우, 변관식 등과 전통회화의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는 '동연사'를 조직하기도 했다.
1926년부터 그는 일제하 신문사들에서 삽화가, 학예부 기자로 일한다. 동아일보의 '일장기 말살사건'은 청전의 붓끝에서 이뤄졌다. "1936년 8월의 어느 날이었다. 손기정이 베를린올림픽에 일본팀으로 출전하여 세계를 제패했다는 뉴스가 들어온 날이다. 체육부 이길용 기자가 구내전화로 나를 불렀다. 사진의 일장기를 태극기로 바꾸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것이었다. 좋다고 대답했다. 의자에 앉아 붓을 들었다."
청전은 이 사건으로 고초를 치르고 이후 10년 간 사실상 칩거한다. 이번 30주기 전에 출품된 '금강산 12승경'은 당시의 작품이다. 청전은 서울 인왕산 밑에 '청연산방(靑硯山房)'이라 이름한 화실을 차리고 거기서 일생을 마쳤다. 화실은 한국화가인 아들 건걸(69·상명대 명예교수)씨 등 가족이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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