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지 100일 만에 서울로 왔다. 대학을 졸업하고 잡지사에 취직했으며 동인지 활동을 했다. 시집 세 권을 내기까지 그는 서울 토박이였다. 어느날 훌쩍 부산으로 떠났다. "부산에서 맞은 첫 해는 괴로웠다"고 했다. 항구니까 사람들이 개방적일 줄 알았는데, 의외로 보수적이어서 마음을 열지 않는 듯 싶어 힘들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정이 들었다. "곳곳에서 억센 사투리가 터져 나오는 어시장의 활력, 맑은 공기, 따뜻한 바람 때문일 것"이라고 시인 강은교(57)씨는 설명한다. 그가 부산에 자리잡은 지 20년째다.강은교씨가 열한번째 시집 '시간은 주머니에 은빛 별 하나 넣고 다녔다'(문학사상사 발행)를 펴냈다. 3년 만이다. 부산 사하구 다대포 해수욕장은 시인의 집에서 가까운 곳이다. 그는 아침마다 모래밭을 거닌다. 그가 그렇게 바다에서 낚아올린 시 70여 편이 한 권의 시집으로 묶였다. '밀물이 달려오다가 썰물에 걸려 넘어지던 날/ 밀물이 모래에 제 살을 문대던 날/ 다대포 모래밭/ 하늘의 정거장 되네'('바지락 줍는 이들에게 분홍 노을이'에서)
강씨는 30여 년 시작(詩作) 활동을 두고 "순례자의 길을 걷는 것"이라고 말한다. 등단작 '순례자의 잠'을 자연스럽게 떠올리게 하는 말이다. 처음 마음을 잃지 않으려는 의지로도 들린다. 그는 젊은 날 '떠나고 싶은 자/ 떠나게 하고/ 잠들고 싶은 자/ 잠들게 하고/ 그러고도 남는 시간은/ 침묵할 것'('사랑법'에서)이라고 사랑법을 전했다. 평론가 황현산씨의 말처럼 "젊었을 때 우리는 강은교의 시들을 연애감정의 한 표본으로 삼았다."
시인의 눈은 보이고 들리는 것 너머에 닿는다. 이제 강씨는 사람들이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는 것을 전해준다. 떨어지는 동백꽃에서 시간의 발걸음을 본다. '동백꽃도 나도 바람눈/ 무거운, 한 세상 달려 있는 것이/ 부담스러운 바람눈,… 시간은 주머니에 은빛 별 하나 넣고 다녔다.'('시간은 주머니에 은빛 별 하나 넣고 다녔다'에서) 사물들의 작고 사소한 몸짓도 시인의 눈으로 걸러내면 숨죽일 만큼 사랑스럽다. 모래밭에서 게와 그림자의 싸움을 발견하는 시인의 아름다운 눈. '그 녀석 다시 분개하여 분홍 집게발-위로 한껏 올림-나 또 멈칫, 그림자를 치워줌. 그 녀석 다시 달리기 시작. 나 다시 따라감. 그 녀석 다시 헉헉-'('싸움'에서)
그리고 사물이 내는 소리를 듣는다. 동백꽃 속에 들어 있는 소리. 모래와 게들의 소리. 모래밭에서 뛰어가는 그림자들의 소리. 모든 사물에 들어있는 진정한 소리, 그러나 아무도 들을 수 없는 소리들을 꺼내놓는다. '아야아-'라는 향가풍 감탄사에 섞인 소리들. '햇빛 소리가 들렸다/ 폐허 한 구석, 어여쁜 햇빛 한 올이/ 나무 등걸에 걸터앉아 있었다…아야아-'('햇빛 소리'에서) '나도 당신 앞에 천 개의 바람이 되네…속삭이는 가을비가 되네… 아야아-' ('천 개의 바람'에서)
/김지영기자 kimjy@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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