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은주(22·단국대 연극영화과 2학년)가 변했다. 밝고 명랑하고 가벼워졌다. 흐트러진 걸음걸이, 개구장이 같은 행동. 분위기를 띄우다가도 못마땅한 게 있으면 참지 못하고 궁시렁거린다. '오! 수정' '번지점프를 하다' 에서 냉정하고 차분한 이미지와의 충돌 때문인가? 보는 사람이 오히려 처음에는 당황할 정도다. '연애소설'에서야 이은주는 비로소 제 나이의 본 모습으로 돌아왔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고교를 갓 졸업한 경희란 인물이 낯설지 않았고, 조용하고 소극적인 수인(손예진)보다 경희가 더 마음에 들었다고 했다. "시나리오를 읽고는 당연히 수인이 내 역이구나 생각했다. 지금까지 이미지가 그랬으니까. 그래서 매니저에게 '저 경희 할래요'라고 졸랐다. 사실은 감독이 경희 역을 맡기려고 한 것도 모른 채."
― 거꾸로 가고 있다. 점점 나이 어린 역으로.
"오히려 재미있다. '오! 수정' 때는 촬영이 끝나고도 한달 동안이나 나이 많은(20대 후반) 수정이로 살았다. 그만큼 충실하게 연기를 했다는 증거이지 않은가."
― 너무나 다른 이은주다.
"전혀 새로운 모습이니까 당연히 달라 보여야 한다. 나의 여러 모습 중 두번째 것을 보여준 것 뿐, 일부러 연기를 위해 이미지를 만들어 놓을 필요가 없었다. 촬영장에서도 차태현 오빠, 손예진하고 '오늘은 뭘로 재미있게 보낼까'로 수다 떨다 그 기분 그대로 촬영에 들어갔다. 그리고 모니터로 '내가 저렇게 했네' 확인하곤 했다. 테스트하는 기분. 애드립이 많이 들어간 것도 그 때문이다. 반응이 좋아 모니터를 보니 나 역시 느낌이 좋았다. 그 쾌감. 코미디언들이 이 맛에 애드립을 하는가 보다."
― 어색하지 않았나? 영화의 분위기가 좀 유치하다는 생각도 든다.
"어색하게 보았나? 그렇다면 늙었다는 증거다. 나는 너무나 자연스러웠는데. 수인이 죽자 경희가 시계(시간)를 거꾸로 돌리는 장면을 보면서는 정말 슬퍼서 울었다. 내 영화 보고 내가 우는게 좀 창피했지만. 너무나 행복하고 따뜻했다. 영화 속의 거의 모든 상황이 실제 경험한 것들이기 때문일 것이다. 가슴 설렌 첫 사랑의 감정도 있었고, 중학교 때부터 비 오면 창가에 기대어 괜히 함께 울고 내가 분위기 잡으면 좋아서 맞장구 치는 친구도, 반면 수인이처럼 차분하게 '안돼'하는 친구도 있었다. 지금도 '3총사'로 만나고 있다. 그래서 비현실적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그 친구들이 고맙다. 차태현 오빠 역시 영화나 지환이와 조금도 다르지 않은 '좋은 사람'이었다. 그래서 더욱 연기를 했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 경희와 수인의 관계가 단순한 친구 이상으로 보인다. 혹시 동성애?
"난 전혀 그렇게 느끼지 않았다. 나 역시 수인이 같은 그 친구에게 지금도 이따금 '사랑한다'고 말한다. 그렇다고 동성애는 아니다. 사랑의 마음까지 느낄 만큼 깊은 우정."
― 하고 싶은 영화는.
"캐릭터가 중요하다. 늘 새로운 것을 해보고 싶다. 깡패나 무사, 설경구 오빠처럼 살을 뺐다 찌웠다 하는 인물. 남들은 감독 제작사 투자자 상대 배우도 본다고 하는데."
― '하얀방'도 촬영 중인데.
"미스터리물이다. 일정에 차질이 생겨 처음으로 동시에 두 가지 연기를 했다. 오늘은 파마 머리로 '연애소설' 의 발랄하면서도 아픔이 있는 경희로, 내일은 머리 풀고 '하얀방'의 싸늘한 수진으로 살았다. 원한 것은 아니었지만 좋은 경험이다."
/이대현기자 leedh@hk.co.kr
■"연애소설"은 어떤 영화/따뜻한 우정… 풀냄새나는 첫사랑
첫 사랑이란 어차피 서툴고 어색할 수 밖에 없다. '연애소설'에서 첫 사랑도 그렇게 시작된다. 시인 김용택은 '연애시집'에서 연애란 말에서 '봄바람에 실려오는 햇풀 냄새가 난다'고 했고, 연애라는 말을 떠올리는 순간 '세상 어느 곳에서 상큼한 머릿결 냄새가 이는 것 같다'고 했다. '연애소설'에서도 그런 냄새가 난다.
고교를 갓 졸업한, 어딘지 모르게 우울한 그림자가 드리워진 수인(손예진)에게 카페에서 아르바이트하는 가난한 고학생 지환(차태현)이 첫 눈에 반한다. 수인의 단짝 친구인 발랄한 소녀 경희(이은주)는 사진 찍기를 좋아하는 지환의 카메라 앞에 불쑥 끼어 들곤 한다. 그들의 첫 만남과 추억은 요즘 정서로 보면 숫기 없는 사춘기 소녀 같다. 나무 뒤에 숨어서 남자의 행동을 보고 깔깔대고, 반딧불이를 부른다며 장작불을 비며대고, 함께 여행을 떠난 바닷가에서 호들갑을 떨면서도 서로 사랑의 마음을 표현하지 못해 가슴 조아린다.
계몽기 연애소설에나 등장할 법한 이런 장면들을 보며 아련한 추억이나 떨리는 감정을 느낄 수 없다면 '연애소설'은 유치할 수 밖에 없다. 영화는 지나치게 순수를 강조한 지환과 수인(나중에는 경희로 바뀌지만)의 뻔한 첫사랑에다 그렇고 그런 삼각관계와 경희와 수인의 동성애적 우정, 두 여자의 죽음을 적당히 섞은 비극적 순정 멜로이다. 차태현의 재치있는 유머도 '엽기적인 그녀'와 비교하면 지나치게 인색하고, 그의 여동생으로 나오는 문근영의 진짜 사춘기 짝사랑이 재미있지만 그건 양념일 뿐이다.
그러나 가만히 마음을 열고 들여다보면 '연애소설'은 유치해 보이는 세 사람, 그들의 관계와 감정 속에 많은 의미를 감추고 있다. 경희와 수인의 어린시절을 통해 영화는 사랑에 대한 의미를 동성간의 깊고도 아름다운 우정으로까지 확대하고, 수인의 죽음과 5년 후 경희와 지환의 재회를 통해 운명과도 같은 사람의 순환을 이야기한다.
한양대를 졸업하고 배창호 감독의 '러브스토리' '정'의 조감독을 거친 신인 이 한 감독의 데뷔작. 감독은 과거와 현재의 정교한 이미지의 반복을 통한 기억찾기, 사진과 편지를 이용한 감정표현, 마지막 극적 반전(인물의 뒤바뀜)을 통해 결코 유치하다고만 할 수 없는 묘한 멜로를 한편 만들어냈다. 13일 개봉. 12세 관람가.
/이대현기자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