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莊子)'를 펼친다. 소요유(逍遙遊) 편에서 다짜고짜 장자(BC 369∼BC 289?·사진)는 한바탕 놀자고 한다. '열심히 일한 당신'이 누리는 자잘한 놀이가 아니다. 시작부터가 뜬금없다. 큰 물고기가 한 마리 있단다. 그 이름이 곤(鯤)인데 길이가 몇 천리나 된단다. 이 물고기가 또 새로 변신하기도 한다. 그 새의 이름은 붕(鵬)이라고 하는데 날개 길이가 몇 천 리나 된단다. 애시당초 알아들으라고 하는 소리는 아닐 게다. 설사 곤이나 붕이 눈 앞에 나타난다고 해도 알아차릴 수는 없다. 금전 액수로 보여줄 수 있는 '당신의 능력'과 무관하다. 안력으로 그 전체를 보기는 불가능하니 말이다. 사실 곤이란 물고기는 곧 바다이고 붕이란 새는 곧 하늘일 게다.사람은 누구나 자기중심적이다. 세상의 기준은 늘상 자기자신이다. 자기중심성 자체를 비난거리로 삼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자기만 중심이라면 그 결과는 수많은 자기들의 충돌로 야단스러울 것이다. 방법이 있다면 자기만을 자기도(남도)로 바꾸는 과정에서 나올 듯하다. 자기중심적 시각을 상대화하는 노력이 필요한 이유이다. 그 상대성의 시각은 나에게만 머물러서도 안 되고 남에게만 머물러서도 안 된다. 그 모두에 머무르면서 동시에 그 모두를 벗어난 자리여야 한다. 이제 '나의 세상'이 아니라 '세상 속의 나'가 더 중요하게 된다. 일상적 감각 속에서 '장자'의 목소리는 이렇게 들린다.
곤과 붕의 전체 모습을 다 볼 수 있는 자리에 설 수 있다면 나의 중심성이란 상대적일 뿐이다. 더 나아가 그 자리에 선다면 '나'는 작디작은 한 점일 뿐이다. 아귀다툼하는 '나'의 사소함을 보여주기 위해 장자는 공간의 경계를 무한히 확장한다. 무한경계(無限境界), 경계무한(境界無限)의 자리에서 자신을 보라고 한다. 하늘에서 보니 '나'만 있는 게 아니라 '남'도 보인다. 더 높이 오르니 나도 안 보이고 남도 안 보인다. 위성에서 찍은 사진에 사람은 없다. 그냥 무심한 세상만이 덩그렇게 놓여있다.
나즈막한 산들로 시계가 막혀 있어 때론 포근하기조차 한 이 땅에서 무한의 경계를 공간적으로 체험하기란 솔직히 거의 불가능하다. 드문드문 이채로운 목소리가 들린다. 금강산 속에서 우국충정에 사로잡힌 송강 정철이 동해 바다 앞에선 신선을 동경했다.('관동별곡') 연암 박지원은 일망무제의 요동벌판을 앞에 놓고는 신생아의 첫울음처럼 목놓아 울고 싶다고만 했다.('열하일기') 이덕무가 섬이 너무나 작다고 걱정한 것도 서해 바다를 굽어보면서였다.('서해여언') 담헌 홍대용은 금강산의 풍경은 사람 마음을 강파르게만 하니, 비로봉을 디딤돌로 삼아 동해바다를 굽어보라고 권했다.('담헌서') 경상도 산골 출신의 이육사가 '까마득한 날에 하늘이 처음 열리고'('광야')라는 무한경계의 상상력을 작동시킬 수 있었던 것도 '만주' 체험 덕이었다.
세상엔 무수한 경계의 선들이 그어져 있다. 다른 누가 아니라 우리 스스로가 만든 경계선이다. 우리에게 선을 긋는 자유와 선을 넘지 않는 자유는 있지만 선을 지우고 경계를 넘는 무한경계의 자유는 드물다. 그리고 여전히 산들과 구릉으로 둘러쳐진 곳이 우리의 '세상'이다. 금강산은 조선후기에 새로 각광받은 산이다. 금강산엔 신선이 살지 않는다. 비로봉 상상두에서 동해로 날아들기엔 이산가족의 피눈물과 분단의 선이 먼저 찾아든다. 역사의 경계를 넘기가 쉽지 않다. 요동벌판과 바다를 마주하고서야 열리는 무한경계를 이 땅에서 쉽게 만나기는 어렵다. 경의선이 이어지면 변화할까. 분단과 국경은 상상력을 억압한다.
공간의 제약을 시간의 축으로 전환시키는 것이 지금으로선 더 적절한 방식일 수도 있겠다. 달라이 라마를 그리는 사람이 떠오른다. 윤회의 사슬을 끊고 정토로 귀의할 수도 있겠다. '나, 이번 생은 포기한다. 다음 생에 다시 승부하련다.' 그저 내세엔 축생이 아니길 빌 뿐이다.
/류준필 성균관대 대동문화연구원 책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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