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가 들면 젊어서 했던 일들을 문득 돌아보게 되는 순간이 있다. 그때는 몰랐던 것들이 보이기도 하고, 다시 하면 더 잘 할 것 같기도 하다. 잊혀진 기억들을 다시 불러내 세상에 제대로 알려주고 싶은 욕망도 생긴다. 요즘 사람들에게 가르쳐주어야겠다는 의무감도 빼놓을 수 없다. 젊어서 한 일이 많은 사람일수록 이 모두는 더욱 강렬하다. 하지만 생각을 실천에 옮기는 사람은 드물고 그래서 더욱 대단해 보인다.'한국 록의 대부'로 불리는 신중현(62)은 바로 그런 사람이다. 그는 이 달 중순께 자신의 예전 노래 18곡을 새롭게 만든 '올드 & 뉴(Old & New)'라는 두 장 짜리 음반을 발표한다. 1번 CD에는 '빗 속의 여인' '커피 한 잔'(이상 64년 발표) '꽃잎' '봄비' (67) 등 60년대 노래들을, 2번 CD에는 '님은 먼 곳에' (70) '거짓말이야' (71) '아름다운 강산'(72) '미인'(73) 등 70년대 곡들이 실려있다. 모두 당대 많은 이들의 마음을 움직이고, 몸을 들썩이게 했던 노래들이다. 이중 '아름다운 강산'과 '미인' 외에는 모두 다른 가수들이 불렀다.
"일부러 히트곡들만을 골랐어요. 지금 나의 모습과 노장이 하는 록을 보여주고 싶었고 신중현의 음악을 모르는 젊은 세대들에게 나의 음악성을 알려주고 싶어서." 작업실인 서울 송파구 문정동의 지하 스튜디오 우드스탁에서 만난 신중현은 짧게 깎은 머리가 하얗게 샜지만, 기타를 부여잡은 작은 체구, 초점이 별로 없는 눈빛에 읊조리듯 내뱉는 말투는 여전히 그다웠다. 마치 세월이 멈춰 버린 듯한 우드스탁은 괴괴하기까지 했지만 신중현이 뿜어내는 기운만은 제법 강하게 느껴졌다.
새 음반을 만들어야겠다고 결심한 뒤 모든 것을 직접 하기로 했다. 몇 번이나 사람에게 속고 실망한 탓에 이번에는 회사도 직접 차렸다. 신중현앰엔씨(www.sjhmnc.com)를 세우고 함께 연주할 사람들을 찾았다. 동년배는 모두 음악을 떠나고 까마득한 후배들 뿐이었다. 가장 먼저 떠올린 건 물론 아버지의 뒤를 이어 기타리스트의 길을 걷고 있는 세 아들. 하지만 음반에는 둘째인 윤철(33)만이 참가했다. "큰 애와 막내는 스케줄이 맞지 않아 '섭외'를 못했어요. 다들 자기 음악 하느라고 바쁘거든"이라고 했다. 편곡부터 마스터링까지 모두 직접 맡았다.
큰 원칙은 두 가지였다. 스튜디오 라이브 방식으로 녹음하는 것과 자신이 직접 노래를 하는 것. "음악은 무엇보다 거짓이 없어야 돼요. 기계가 아무리 좋아도 사람이 직접 연주하고 부르는 것만 못하거든." 잘 된 부분만 따서 컴퓨터로 붙이지 않고 그를 포함해 다섯 명이 스튜디오에 모여 한 노래를 처음부터 끝까지 마음에 들 때까지 연주했다. 몇 배의 힘이 들었지만, 끝까지 후배들을 달래고 설득했다. 직접 노래를 하기로 한 건 미8군 무대 시절부터 50년 넘게 음악을 해 오면서 터득한 나름대로의 창법이 자신의 음악성에 가장 잘 맞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김추자나 김정미, 이정화의 역할을 대신할 여가수를 생각해보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시간도, 믿음도 없었다. 그래서 나온 음악은 "옛 것이 있으면서도 새로운 감각이 있는 음악"이다. "기본 요소는 그대로 하되 입체감을 주었어요. 언뜻 들으면 예전 노래와 비슷하지만, 자꾸 들으면 새로운 감각이 느껴질 겁니다."
음반 출시 후에는 우드스탁에서 6개월 간 무료 공연을 연다. 바로 앞에서 음악을 보고 듣기 원하는 사람에게만 예약을 받는다. 방송은 "나가는 것이 손해라" 일체 사절이다.
대신 10월에는 젊은 사람들의 의견을 받아들여 만든 '미인'의 뮤직 비디오가 선보인다.
또 내년 쯤에는 자신의 작품들 중 굵직굵직한 록을 추려 큰 아들 대철(35)과, 60,70년대의 주요한 음악 사조였던 사이키델릭 곡들을 모아 막내 석철(31)과 음반을 만들고 60년대 우드스탁에 근접한 록 페스티벌도 계획하고 있다.
"젊어서는 유행가인 트롯도 아니고 미국 음악도 아닌 한국적인 록, 신중현만의 독특한 음악을 만들고자 무던히 애를 썼지. 이제는 인생도 음악도 정리할 때가 된 것 같아요. 그래도 변함 없는 건, 나는 음악을 하는 순간이 제일 즐겁다는 거야." 그는 정말 고집스럽고 행복해 보였다.
/김지영기자 koshaq@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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