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7년은 정치적으로 중요한 해였다. 6대 대통령 선거(5월3일)와 7대 국회의원 선거(6월8일)가 있었다. 나에게도 의미가 깊은 해였다. 6대 전국구 의원 생활을 정리하고 새 출발을 해야 했다.나는 고향인 대구에서 출마하기로 결심했다. 3년 반 전 아무 준비가 없던 때와 달리 지역구 출마에 어느 정도 자신감이 생겼다. 피할 수 없는 선택이기도 했다. 정치를 계속하기 위해서는 지역구를 가지는 게 당연했다.
나는 공화당 공천으로 대구 중구에 나섰다. 마음의 각오는 돼 있었지만 처음으로 치르는 국회의원 선거는 결코 만만하지 않았다. 더구나 뜻하지 않는 선거 방해까지 감수해야 했다. 반년 전 한국비료 사카린 밀수사건(나의 이력서 2,3,4회 참조) 때문이었다. 당시 이병철(李秉喆)씨를 구속하라고 말한 것 때문에 나는 그의 낙선 대상 후보 리스트에 올라 있었다.
이씨 측의 선거 방해는 대단했다. 그가 소유한 한 신문사의 대구판은 나를 떨어뜨리기 위해 전혀 사실과 다른 기사를 실었다. 예를 들어 나의 유세 장면과 술통을 싣고 양조장 앞에 서 있는 자전거 사진을 교묘하게 합성해 '유세 후 유권자들에게 막걸리를 먹여 표를 구걸한다'고 사진설명을 달았다.
대구의 제일모직 공장 종업원들까지 조직적으로 동원돼 선거 방해에 나섰다. 투표 직전 이 공장의 노무과장은 운동장에 종업원들을 모아 놓고 "이만섭이 당선되면 우리 공장은 문을 닫아야 한다. 그러니 중구에 사는 친척이나 친구들에게 절대로 이만섭을 찍으면 안 된다고 말하라"고 노골적으로 지시했다. 당시 대구에는 나의 경쟁 후보에게 막대한 선거 자금이 제공됐다는 이야기가 공공연하게 나돌기도 했다.
나는 정면돌파를 결심했다. 선거 후 소를 취하하긴 했지만 허위보도를 이유로 이병철씨 소유 신문사를 고발했고 유세 때마다 한국비료 밀수 사건을 부각했다. "여러분, 이번 선거는 밀수 재벌이 이기느냐, 아니면 정의가 이기느냐는 싸움입니다. 나는 대구 시민의 정의감을 믿습니다." 정말 그 때는 피눈물을 흘리면서 선거 운동을 했다.
이병철씨의 선거 방해는 후일 사실로 밝혀졌다. 이병철씨의 장남 이맹희(李孟熙)씨가 93년 발간한 자신의 회고록 '묻어 둔 이야기'에서 이 사실을 털어 놓았다. 나의 수창초등학교 1년 후배이기도 한 그의 회고록에는 이렇게 씌어져 있다. "아버지로부터 이만섭씨를 낙선시키라는 지시를 받았다. 제일모직 임원들에게 특별 지시를 했고, 취재기자들에게 취재비를 더 주는 등 갖가지 조치를 다 취했다."
악전고투 끝에 가까스로 나는 당선됐다. 전국적 선거 결과는 공화당의 압승이었다. 공화당은 전국구를 포함, 모두 130석을 얻었고 야당인 신민당은 44석을 얻는 데 그쳤다.
야당에서는 6·8 총선을 무효라고 선언했다. 전국적으로 투·개표 과정에서 부정이 있었다는 주장이었다. 야당은 재선거를 요구하며 국회 등원을 거부했다. 학생들까지 야당의 주장에 동조, 전국의 각 대학에서 '6·8 부정선거' 규탄 데모가 이어졌다. 결국 6월15일 28개 대학과 57개 고교에 휴교령이 내려졌다.
공화당은 사태가 심상치 않게 돌아가자 부정선거를 비공식적으로 인정했다. 자체 조사를 벌여 부정선거 혐의가 명백한 공화당 당선자 6명을 제명했으며, 10명 이상을 부정선거 혐의로 구속하는 등 야당을 달래려고 애썼다. 등원을 거부한 야당은 부정선거 시인 및 사과 부정선거 특별조사위 구성 부정선거 관련자 인책 등을 등원 조건으로 내걸었다. 공화당은 부정선거로 재선거가 실시되는 지역에 후보를 내지 않겠다는 약속을 하고 등원을 유도했다.
우여곡절 끝에 7대 국회는 공화당 의원들만 참석한 가운데 7월10일 개원했다. 이효상(李孝祥) 의원이 국회의장에, 장경순(張坰淳) 의원이 국회부의장에 다시 선출됐고 나는 재선 의원으로 7대 국회를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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