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나라당이 지난 주 방송 4사에 발송한 '협조 공문'이 말썽이다. 이회창(李會昌) 대통령 후보의 장남 정연(正淵)씨 병역의혹 보도 시 정연씨의 얼굴 사진과 이 후보 아들이라는 수식어를 사용하지 말고, 검찰 발표만 보도해달라는 내용이다. 5공 초기의 언론통제를 연상시키는 '신 보도지침'이라는 민주당이나 방송사 노조의 격한 비난이 없더라도 "어처구니 없다"는 일부 당 관계자들의 자탄에서 이 요구가 무모한 일이었음을 알 수 있다.검찰의 병풍(兵風) 수사와 언론의 보도태도에 신경이 곤두설 수 밖에 없는 한나라당의 입장을 십분 감안한다 해도, 이번 일은 정상적 대응의 한계를 벗어난 오만이라는 비판을 면키 어렵다. 이런 사정들 때문에 "이 후보를 향한 의원들의 충성경쟁이 도를 넘었다"는 지적이 나오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사실 한나라당의 최근 기류를 보면 더 큰 '사고'가 나지 않은 게 오히려 이상할 정도다. 지난달 30일 의원총회는 "MBC 사장이 대선 때까지 이 후보 아들 병역의혹을 크게 보도하라고 지시한 비공식 문건을 입수했다"는 폭로성 발언이 나오면서 의원들의 전의(戰意)를 자극했다. 이어 의총이 비공개로 진행되자 의원들은 "MBC의 당 취재를 거부해야 한다" "MBC에 몰려가 항의 시위를 하자"는 등 극단적 대응을 경쟁적으로 주문했다. 유일하게 한 초선 의원이 "너무 지나친 것 아니냐"며 "이러다가는 전투에서 이기고 전쟁에선 지고 만다"고 자제를 촉구했지만, 강경론에 압도당했다. 협조 공문과 같은 무리수가 나올 수 밖에 없는 강경 만능 의식이 당 전반에 퍼져 있는 셈이다.
8·8 재보선 압승으로 한나라당이 원내 과반의석을 차지한 이후 거대 한나라당의 행보에 가뜩이나 시선이 집중되고 있는 상황에서 이런 분위기는 위험천만하다. 제2, 제3의 자충수가 나올 소지가 다분하다는 지적들이다. 한나라당은 지금 과유불급(過猶不及)이라는 말을 되새길 때다.
유성식 정치부 차장대우 ssyoo@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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