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9월 11일 아침 뉴욕 세계무역센터(WTC)와 워싱턴의 펜타곤을 강타한 초유의 사건은 미국에게는 '테러' 라는 21세기의 적을, 전세계에는 일방주의로 치닫는 '미국' 이라는 새로운 과제를 던졌다. 기독교와 이슬람교 간 '문명의 충돌' 로 비화할지도 모른다는 위기감 속에 사건 초기 미국 주도의 반테러전에 가담했던 국제사회는 이제 '힘의 외교'를 강제하는 미국의 신보수주의 실체에 우려의 시선을 던지며, 반테러 연합전선도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미국 사회도 많은 변화를 겪고 있다. 9·11 이후 1년 세계와 미국은 어떻게 바뀌었을까.
▶'적 아니면 우방'
'나인 일레븐(Nine Eleven)'은 이제 영어 사전에도 등재될 만큼 단순한 사건이 아닌 상징적 의미를 지니게 됐다. 9·11은 세계의 정치 지도를 뒤바꾸었으며 그 변화는 지금도 진행 중이다. 21세기 최초의 전쟁이 곧 터질지도 모른다. 아프가니스탄을 비롯한 중앙아시아, 동남아, 구소련 연방으로까지 팽창한 미군의 존재로 정치·군사 지형도는 과거와 판이해졌다. 9·11 직후 "미국편에 서든지, 테러편에 서라"는 조지 W 부시 대통령의 양자택일 논리는 충격에 휩싸인 미국의 분노를 대변한 것으로 세계는 이해했다. 그러나 이라크로의 확전을 앞둔 지금 다시 거론되고 있는 '적 아니면 우방' 은 "미국에 추종하지 않는 국가는 미국의 적" 이라는 뜻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한편으로 국제여론을 무시한 미국의 일방주의는 반테러전이라는 초기의 명분을 희석시키고 있다. 이라크를 치겠다는 독단적 전쟁론과 부시 정부 출범 이후 환경, 무역, 외교 등 거의 모든 분야에서 노골적으로 드러난 미국의 일방주의 국익우선 정책은 세계적으로 반미의 분위기를 확산시키는 계기가 됐다. 교토(京都) 의정서 탈퇴, 국제형사재판소 비준 반대, 일방적 무역장벽 등 세계는 미국이 반테러전을 주도할 만한 도덕적 자격을 갖추고 있는지에 회의하고 있다.
▶미국과 반목하는 세계
이라크로의 확전은 게르하르트 슈뢰더 독일 총리, 자크 시라크 프랑스 대통령 등 유럽 강국이 정면으로 반기를 들면서 동맹국 간 힘겨루기로 변질된 듯한 양상이다. 벨기에 정부는 "유럽의 국제적 위치를 스스로 깎아내리는 행동" 이라며 미국에 수동적, 무비판적인 영국 정부에 비난의 화살을 돌렸다. 토니 블레어 총리가 내세운 미국―유럽 간 가교역이라는 '허울 좋은' 명분에 매달리지 말고 유럽을 위한 영국이 되라는 주문이다. 근저에는 미국과의 공조보다는 미국의 독선을 견제할 수 있는 '힘 있는 유럽' 을 만드는 것이 급선무라는 인식이 깔려 있다.
미국 민주당은 물론 공화당 내 중진, 과거 백악관 관리들과 지식인들이 나서 '신 윌슨주의' 를 주창하며 협력을 통한 미국 가치의 실현을 요구하는 것은 이같은 위기감의 반영이다. 백악관은 세계적 반미주의의 분석과 완화를 목적으로 한 홍보 전담조직까지 만들어야 했다.
분열된 서방세계와는 달리 이슬람권의 아랍국가들은 어느 때보다 견고한 반미 공조를 구축해 나가고 있다. 아랍의 맹주 사우디 아라비아가 자국 내 미군기지 제공을 거부하면서 촉발된 반미 정서는 미국 내 우방이며 걸프전 당시 다국적군에 가담했던 이집트, 카타르, 시리아, 바레인, 요르단 등 전 지역으로 확산되고 있다. 이슬람 과격 테러리스트를 뿌리뽑겠다는 반테러전이 미국에 대항한 이슬람권의 대동단결을 부추기는 역풍을 부른 꼴이다.
대미 투자자금을 회수한 사우디의 조치는 부시 정부의 국내 입지도 반미 물결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준 실력행사의 한 단면이다. 부시 대통령이 '악의 축' 이라고 거명했던 이란, 이라크, 북한에 대한 러시아의 잇단 '우호의 축' 행보 역시 미국식 흑백논리대로 세계가 움직여주지 않는다는 메시지이다.
▶미군 주둔과 러시아와의 전략적 이해
미군이 주도한 아프간 전쟁은 과거 구소련 연방이었던 중앙아시아는 물론 동남아, 중남미, 인도―파키스탄 등 거의 전세계 정치색깔을 바꿔놓았다. 특히 우즈베키스탄, 키르기스스탄, 타지키스탄, 그루지야의 미군 주둔은 구 소련 연방 내 최초의 미군기지라는 상징성과 함께 경제·군사적 이해관계를 매개로 한 미―러시아 간 전략적 관계가 가속화할 것이라는 점을 보여준 사례이다.
동쪽으로 중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키르기스스탄에서 서쪽으로 흑해 연안 그루지야까지 러시아 이남 중앙아를 대부분 포괄하는 이 지역에는 1년 전만 해도 단 한명도 없던 미군이 5,000여 명 가까이 배치돼 있다. 과거 카스피해 주변국의 막대한 석유·가스 자원에 눈독을 들여 온 미국은 대테러전을 앞세워 이 지역 경제지분을 확보할 수 있는 발판을 얻었고, 러시아는 체첸과의 전쟁,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및 유럽연합(EU)과의 밀착에 미국의 협조와 양보를 끌어내는 실리를 챙겼다.
5월 군축협정에 따른 핵무기 감축도 경제재건이 급선무인 러시아가 앞마당 중앙아시아를 미국과 공동경영하는 대신 얻어낸 반대 급부이다.
부시 정부의 노골적 친이스라엘 정책으로 유혈사태가 2년째 계속되고 있는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반군 제거를 명분으로 미군의 지역 거점으로 부상하고 있는 필리핀, 콜롬비아 등은 반테러전쟁이 증폭시킨 지역갈등의 또다른 부산물이다.
/황유석기자 aquarius@hk.co.kr
■테러와의 전쟁 일지
●2001년
▶9.11
19명의 테러리스트들이 미국 여객기 4대를 납치해 뉴욕 세계무역센터와 워싱턴 국방부 청사(펜타곤)에 충돌, 한 대는 펜실베이니아에 추락
▶9.13
콜린 파월 미 국무장관, 빈 라덴을 테러 배후로 지목. 미 의회, 조지 W 부시 대통령에게 아프가니스탄 탈레반 정권 공격을 승인.
▶10.2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집단자위 조항 발동.
▶10.7
미국, 탈레반 정권이 오사마 빈 라덴과 그 세력들을 인도하라는 최후 통첩을 거부하자 영국과 함께 아프간 공격 개시. 빈 라덴, 성전 선포.
▶11.13
아프간 반군 북부동맹 카불 입성
▶12.3
아프간 4개 정파, 파슈툰족 지도자 하미드 카르자이를 수반으로 하는 과도정부 구성에 합의.
▶12.7
탈레반 최후 거점 칸다하르 함락. 탈레반 지도자 모하마드 오마르 도주.
▶12.11
알 카에다 항복 선언
●2002년
▶1.29
부시, 국정 연설에서 이라크, 이란, 북한을 ‘악의 축’으로 지목.
▶1.31
미군, 필리핀서 반정부 조직 아부 사야프에 대한 전투 개시
▶3.3
동맹군 2,000여 명, 아프간서 아나콘다 작전 개시
▶3.18
아나콘다 작전 종료, 미군 8명 전사 및 50명 부상
▶5.23
부시, 사담 후세인 이라크 대통령 제거 천명.
▶6.6
부시, 국토안전보장부 신설 등 연방정부 개편안 발표
▶6.11
아프간, 로야 지르가 개최, 이틀 후 카르자이 수반을 새 정부 총리로 선출.
▶8.12
사우디 아라비아, 이라크 공격 위한 미국의 자국 영토 이용 불허 발표.
▶8.17
2002년 미 국방보고, 테러 조직 소탕에 선제 공격 필요하다고 강조.
■9·11이 남긴 말말말
이번 사태로 할리우드 영화가 영원히 달라질 것이다. (할리우드 마이클 피기스 감독)
광기는 그것이 비록 절망에서 비롯했다는 핑계가 있다 하더라도 세계를 변화시킬 수 있는 힘이 되는 것은 아니다. (르몽드지 콜롱바니 주필)
나는 정의를 원한다. 그리고 예전 서부에 내걸렸던 현상수배 포스터가 내걸릴 것이다. (부시 대통령)
미국민은 그들의 지도자들이 뿌린 가시나무를 수확한 셈이다. (사담 후세인 이라크 대통령)
문명의 충돌이 아니라, 문명에 대한 야만인들의 비열한 공격이다. ('문명의 충돌' 저자 새뮤얼 헌팅턴 교수)
모든 국가는 결정을 내려야 한다. 우리와 함께 할 것인가, 아니면 테러범들과 함께 할 것인가. (부시 대통령)
테러와 총으로 싸워서는 안 된다. (독일의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귄터 그라스)
나는 종교가 충돌의 대의명분으로 이용돼서는 안된다는 사실을 재확신한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미국이야말로 기소된 테러국가다. (미국 언어학자이자 사회비평가인 노엄 촘스키 교수)
9·11 테러가 미국에 무제한의 사냥면허를 준 것은 아니다. (뉴욕타임스 사설)
부시 대통령이 북한, 이라크, 이란을 잠재적 적국으로 지목했지만 의회는 아프간 전쟁을 이런 국가들까지 확대하도록 백지위임하지는 않았다. (예일대 브루스 애커먼 교수, LA타임스 기고)
9·11 테러 이후 미국 언론은 스스로 애국심을 검열하고 있다. (워싱턴 포스트 사설)
지도력은 일방주의와 동의어가 아니다. (미 민주당 하원 지도자 리처드 게파트 의원)
미국은 전쟁 중이다. 우리는 세계 최악의 지도자들이 세계 최악의 무기를 개발, 배치, 확산하는 것을 결코 용납하지 않겠다. (부시 대통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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