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추석 전에 남북 이산가족 상봉이 이뤄진다고 한다. 반갑고도 기쁜 일이다. 그렇지만 한편으로 안타까운 생각이 든다. 상봉 이산 가족의 숫자가 너무 제한적이고 만남 자체가 정례화하지 못했기 때문이다.이산 가족 상봉을 지켜볼 때마다 나는 6대 국회 때 '남북가족 면회소 설치에 관한 결의안'을 제의했던 일이 떠 오른다. 당시 내가 결의안을 제의한 것은 1964년 10월9일 도쿄(東京) 올림픽에서 북한 신금단(辛今丹) 선수와 부친 신문준(辛文濬)씨가 14년 만에 극적으로 재회한 것이 직접적 계기였다.
나는 감격적인 혈육 상봉을 지켜 보며 남·북으로 흩어진 가족들이 서로 만날 수 있도록 해야 하겠다고 생각해 10월27일 남북가족 면회소 설치에 관한 결의안을 국회에 제안했다. 판문점에 면회소를 설치하되 상봉자 명단 작성과 주선은 남북 적십자사와 국제적십자가가 공동으로 맡아서 한다는 내용이었다.
이는 분단 이후 남북을 통틀어 이산가족 상봉과 남북 교류에 대한 최초의 제안이었다. 의원들의 호응이 잇따랐다. 김영삼(金泳三) 김대중(金大中) 박순천(朴順天) 박준규(朴浚圭) 조윤형(趙尹衡) 의원 등이 결의안에 서명했다.
그러나 나는 이로 인해 뜻하지 않은 정치적 박해를 받았다. 김형욱(金炯旭) 중앙정보부장이 이를 반공법 위반으로 몰아 붙인 것이다. 내 주장은 용공으로 몰렸고 다음날부터 태평로 국회의사당 앞에는 유령 단체인 '애국 청년단'의 이름으로 '타도하자 이만섭'이라고 적힌 전단이 수없이 살포됐다. 집으로도 익명의 협박 전화가 무수히 날아 들었다.
나는 일련의 사건이 김 부장의 지시 아래 일어나고 있음을 쉽사리 알아 챌 수 있었다. 서울신문에 박관수 반공연맹회장의 이름으로 '이만섭의 결의안을 통박함'이란 제목의 글이 실렸는데 박 이사장이 내게 전화를 해 이렇게 말했다. "내가 알지도 쓰지도 않은 글이 오늘 서울신문에 실렸는데 날 원망하지 마시오." 박 이사장이 쓰지 않았다면 뻔한 일이었다.
결국 이 일은 민복기(閔復基) 법무장관이 국회에서 증언할 정도로 번졌다. 민 법무장관은 국회 본회의에서 이렇게 밝혔다. "이 결의안은 반공법에 위배됩니다. 다만 이만섭 의원이 국회의원으로서 원내 활동 중이어서 면책될 뿐입니다." 나는 의석에서 벌떡 일어나 소리를 질렀다. "여보, 당신 같은 사람이 어떻게 법무장관을 한단 말이오. 자유민주주의를 신봉하는 우리가 인도적 문제에 앞장서야 될 거 아니오. 친부모 형제를 만나게 해 주자는 게 어떻게 반공법 위반이란 말이오?"
김 부장은 내가 결의안을 철회하지 않으면 당장 잡아넣겠다고 협박해 왔다. 참다 못한 나는 박 대통령을 만나 결의안 제출 동기와 내용, 김 부장의 공갈·협박 등 모든 것을 털어 놓고 이해를 구했다. 박 대통령은 내 주장의 정당성을 인정했다. 나는 이 얘기가 김 부장 귀에 들어 가도록 일부러 정가에 소문을 퍼뜨렸다. 그 후 김형욱 부장의 압력이 상당히 누그러졌다.
11월6일 제11차 외무위원회에서 나는 결의안에 대해 이런 요지의 제안 설명을 했다. "자유민주주의에 의한 통일을 이루기 위해서라도 자유와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려는 우리가 주도권을 가져야 합니다. 이 결의안은 자유민주주의에 의한 통일을 향한 일보 전진이라는 신념에서 제안한 것입니다."
그러나 결의안은 끝내 본회의에 상정되지 못했다. 중앙정보부의 압력을 받은 여당 당직자, 의원들이 결의안 채택을 주저했기 때문이다. 당시 신문들은 이를 대서특필했는데 대부분의 신문들이 결의안을 찬성했다.
이때 내가 뿌린 씨는 나중에 71년 8월 대한적십자사의 남북 이산가족 찾기 운동 제의로 이어졌고, 1972년 7·4 공동선언으로 마침내 남북교류가 구체적으로 시도됐다. 그리고 김대중(金大中) 정부가 들어선 이후에도 남북 이산 가족이 상봉을 하고 있다. 지금이라도 그 때 내 주장처럼 남북 이산가족 면회소를 설치해 정례적으로 만날 수 있도록 제도적 장치를 갖추는 것이 바람직한 방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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