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중국, 러시아는 북일 정상회담이 동북아 정세의 중대 변화를 예고하는 것으로 보고 긴박하게 움직이고 있다. 미국은 핵 전략 면에서 북일 관계의 '과속'을 경계하지만, 대 중국 전략 상 일본의 대북 접근을 환영할 수도 있다는 입장이다. 반면 중국은 완충지대인 북한 주변의 세력 재편을 경계하고 있다. 러시아도 유라시아 철도 연결을 통해 한반도에 이해관계를 갖게 됐다. 따라서 이번 회담은 장기적으로는 냉전 종식 후 10여년 간 힘의 공백지대로 남아 온 북한에서 주변 강국의 세력 각축을 촉발할 가능성이 있다. 전후 청산뿐 아니라 동북아 냉전 유산의 청산이 시작됐음을 알리는 신호탄이기도 하다.■美, 日 과속 우려속 對北정책 변화조짐/ 韓·日과 보조 맞출듯
북일 정상회담에 대해 미국은 일단 환영 의사를 밝히고 있지만 속내는 좀 복잡하다. 미 국무부는 30일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일본 총리의 방북에 대해 "그의 외교 노력을 환영한다"며 "이번 방북이 일본과 북한 간 중요 과제의 조기 해결을 이끌어내 북한이 국제사회의 책임있는 일원이 되는 데 공헌하기를 희망한다"는 공식 논평을 발표했다.
외견상으로는 미국이 북일 정상회담을 지지할 뿐 아니라 큰 진전을 바라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미국의 속내는 전격적인 회담 성사에 대한 당혹감과 우려감이 혼재돼 있다는 게 워싱턴 외교가의 분석이다.
31일자 일본 마이니치(每日)신문은 워싱턴발 기사로 이렇게 보도했다. 미 국무부는 미국과 일본이 북일 관계를 포함한 광범위한 과제에 대해 관심을 공유하고 긴밀한 협조가 계속되기를 기대한다고 발표했는데, '기대한다'는 표현에는 미국의 우려가 포함돼 있다는 분석이다. 대테러 전쟁의 흐름 속에서 북한의 대량 살상무기 개발에 관심을 두고 있는 부시 정권은 일본이 국교정상화에 집착해 이 문제를 소홀히 취급할까 내심 걱정하고 있다는 것이다. 또 일본이 북한에 제공할 거액의 배상금이 어떤 용도로 사용될지 우려하고 있다.
출범 이후 대북 강경책을 구사하다 한국 정부와 국제사회의 여론에 따라 마지못해 미적미적 대북 대화에 나선 부시 행정부로서는 느닷없는 일본의 방향 선회에 적지않게 놀란 게 사실이다.
워싱턴 외교관계자는 "이달 초 서울에서 열리는 한미일 3자조정감독그룹회의(TCO')에서 어떤 형식으로든 미국이 한일 양국에 불만을 표출할 가능성이 크다"며 "그러나 미국도 당분간 한일 두 나라의 행보에 보조를 맞출 수밖에 없을 것으로 보인다"고 전망했다.
/워싱턴=윤승용특파원 syyoon@hk.co.kr
■中, 北·日 급진전땐 발언권 확보 나설듯/ 당분간 성급대응 자제
중국은 북일 정상회담 개최를 환영한다는 공식 입장을 밝혔지만 의중을 분명히 드러내지 않고 있다. 쿵취앤(孔泉) 외교부 대변인은 30일 "중국은 북한과 일본이 관계를 개선하고 궁극적으로 국교정상화에 이르는 것을 일관되게 지지해 왔다"며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총리의 북한 방문이 2차대전 전후 처리 문제와 한반도의 평화와 안정에 도움이 되길 바란다"고 밝혔다. 중국은 북한과 러시아 간에 급진전을 보이고 있는 시베리아횡단철도(TSR)와 한반도종단철도(TKR) 연결 사업에도 아직 관심을 보이지 않고 있다.
외교 소식통들은 그러나 북일 관계가 급진전될 경우 중국이 북한에 있어 외교적으로 가장 영향력 있는 국가라는 점이 희석될 수 있으므로 북한에 대한 발언권을 확보하기 위한 전략을 구사할 것으로 관측했다. 다만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이 러시아보다 중국을 더 자주 방문하고, 북한의 경제 개혁이 중국 모델을 따라가고 있는 만큼 성급하게 대응할 필요를 느끼지 않고 얼마간 지켜 보겠다는 입장인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베이징=송대수특파원dssong@ hk.co.kr
■러, 경제 실리에 초점… 비교적 입장 느긋/ 화물수송 등 이득 기대
러시아는 북한과 일본의 관계 개선에 막대한 경제적 실리를 기대하며 북일 정상회담 개최를 환영하고 있다.
러시아 외무부는 30일 성명을 발표, "일본 총리의 북한 방문이 동아시아 지역 긴장 완화에 도움을 줄 것"이라고 밝혔다. 앞서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은 27일 일간 블라디보스토크와의 회견에서 "지금 국제사회는 북한과의 관계 정상화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며 세계 각국과 북한의 관계 정상화를 지지한다는 입장을 내비치기도 했다.
러시아는 최근 미국의 대북 강경책에도 불구하고 국제사회에 북한의 입장을 대변하며 긴밀한 관계를 유지해 왔기 때문에 북일 관계의 급격한 변화에도 비교적 느긋한 편이다. 이미 지난달 양국 정상회담에서 시베리아횡단철도(TSR)와 한반도종단철도(TKR)의 연결 사업에 합의하고, 북한 무기 현대화 계획에 깊이 관여하는 등 양국 관계를 돈독하게 다졌다. 북일 관계개선으로 러시아는 TSR-TKR 연결이후 유럽과 일본 간의 화물 수송 등에서 큰 이득을 올릴 가능성이 커지는 것이다.
/남경욱기자 kwnam@ hk.co.kr
■ 우리정부 시각/"北·美대화도 무르익을 것"
17일 열릴 평양 북일 정상회담을 바라보는 정부 당국자들의 시선은 이후 진행될 북미 대화를 향하고 있다. 정부 당국자는 1일 "북한이 한국과 일본을 거쳐 미국으로 가려는 모양"이라며 "북일 정상회담은 한반도 냉전 구도 해체의 결정적 계기인 북미 대화에 긍정적 역할을 할 것"이라고 관측했다. 6·15 남북정상회담 이후 남북간에 조성된 화해 협력 기운이 북일, 북미쪽으로 자연스럽게 이동하고 있다는 시각이다.
당국자들은 김정일(金正日) 국방위원장과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일본 총리가 정치적 결단을 내려 수교 교섭의 조기 타결을 겨냥할 수 있도록 주변 여건을 조성하는 데 힘을 기울일 방침이다. 북일 정상회담에서 요도호 납치범 일본 송환 문제 등에 진전이 있을 경우 북미 대화는 더욱 무르익을 것이라는 전망이다. 따라서 정부는 이달 중순 뉴욕에서 열릴 한일 외교 장관회담을 통해 북일 관계의 조기 정상화를 바라는 입장을 일본측에 전달할 예정이다. 그러나 북일 정상회담에서 김 국방위원장의 서울 답방을 간접 촉구하도록 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크게 무게를 두지 않는 분위기다.
다만 정부는 북일 정상회담을 전후로 남북간 도로·철도 연결 문제에 관해 북측의 이행 의지를 확인하는 데 힘을 쏟기로 했다. 한 당국자는 "미측은 북일 정상회담 결과는 물론 경의선 철도 연결 사업 진행 상황 등을 점검하고서야 본격적 대북 대화에 나설 것"이라고 말했다.
/이영섭기자 younglee@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