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일본 총리의 9월17일 북한 방문은 북일 양측의 오랜 단절이 막을 내리고 있음을 상징한다. 30일 오후 마련된 긴급 대담에서 김호섭(金浩燮) 중앙대 교수와 서동만(徐東晩) 상지대 교수는 역사적 북일 정상회담이 북일 국교 정상화를 본궤도에 올리고 한반도 안정과 평화를 다지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진단했다.김호섭= 고이즈미 일본 총리의 9월17일 북한 방문에서는 기존의 일본 외교 정책과 비교해 두 가지 특징이 엿보인다. 우선 대개는 실무 차원의 조정이 끝나고 정상회담을 갖던 것과 달리 이번에는 실무적으로 해결해야 할 일을 남겨 둔 채 정상회담을 먼저 여는 형식이다. 또 그동안 역사 왜곡 교과서나 야스쿠니(靖國)신사 참배 문제 등에서 보았듯 아시아에 대한 배려를 결여한 채 미국 중심 외교에 매달렸던 고이즈미 총리가 미국의 대북 강경 노선이 기본적으로 견지되고 있는 가운데 대북 온건 노선을 택했다는 점도 눈에 띈다.
서동만= 양측은 1990∼92년 국교정상화를 위한 교섭을 벌였고 2000년 남북 정상회담 직전에 교섭을 재개했다. 남북·북미 관계 정체로 양측의 교섭은 중단됐으나 이미 10차례의 교섭을 통해 대부분 입장을 정리해 둔 상태여서 정치적 타결만 남긴 상태였다. 25∼26일 평양에서 열린 국장급 회담 발표문에는 '제반 문제 해결에 정치적 의지가 중요하다'거나 '포괄적 추진 방식으로 교섭의 조기 재개에 노력한다'고 정치적 의지와 포괄적 추진을 강조했다. 고이즈미 총리의 방북을 염두에 둔 표현이었다. 최근 일본은 미국에 대해 일본의 독자적 역할을 나름대로 강조해 왔다. 특히 대북 문제에서는 미국의 강경론보다는 한국 정부의 포용정책 쪽으로 기운 감이 있다. 미국의 일방주의, 특히 동북아의 긴장을 고조시키는 미국의 정책에 대해서는 부담과 거부감을 보여 왔다. 고이즈미 총리는 우리에게는 보수·강경 이미지가 강하지만 적어도 대북 정책에서는 조지 W 부시 행정부와 선을 그어 왔다.
김호섭= 조금 다른 생각이다. 북한은 일본이 대북 포용정책에 동참할 수 있는 아무런 동기를 부여하지 못했다. 98년 대포동 미사일 발사, 99년 공작선 침투, 지난해 괴선박 침몰 사건 등이 잇따랐다. 일본인 납치 문제 등 해묵은 현안에 대해서도 성의를 표시하지 않았다. 김대중(金大中) 대통령이 모리 요시로(森喜朗) 전총리에게 김정일(金正日) 북한 국방위원장과의 직접 대화를 권했을 때 모리 전총리는 "우리의 개별 현안이 있다"고 강조했다. 대북 강경책과 온건책을 둘러싼 일본 국내의 논쟁도 계속되고 있다. 따라서 고이즈미 총리의 방북은 일본 대북 정책의 커다란 변화라고 할 수 있다. 이런 변화는 북한 체제의 붕괴 가능성을 심각히 고려했기 때문이다. 특히 최근의 해상 집단 탈북에서 심상치 않음을 느꼈고 일본의 국익에 도움이 되지 않는 북한의 붕괴 가능성을 낮추기 위해 적극적 정책 변화에 나선 것이다.
서동만=고이즈미 총리의 방북은 일본 국내 정치와 최근의 한반도 정세가 배경이라고 할 수 있다. 남북 철도 연결 합의는 결정적인 영향력을 미쳤다고 볼 수 있다. 남북과 중국, 러시아가 참여하는 철도 사업의 실현 가능성이 커져 이대로 있다가는 일본은 동북아에서 외교적 고립을 피하기 어렵다. 한편으로 시장경제 도입 움직임으로 보아 북한은 본격적으로 외부 지원을 필요로 하며 특히 일본의 경제지원이 절실하다. 납치 의혹에 대해 북한이 전향적인 태도를 보인 것이 그런 신호이다. 한편으로 고이즈미 총리의 지지율 급락과 일본 외교의 위기도 중요한 배경이다. 일본은 대러시아 외교가 벽에 부딪친 것은 물론 이런 저런 스캔들로 일본 외무성은 국민적 비난의 대상이 돼 있다. 그 탈출구가 필요했다.
김호섭=일본의 국내 정치적 배경에 대해서는 동감이다. 고이즈미 총리는 리더십을 보여 주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일본인 납치 문제에 대한 북한측의 분명한 성의를 받아 내지 못하면 여론을 설득하기 어렵다. 북일 정상회담이 김 국방위원장의 러시아 방문 직후에 발표된 것이 눈길을 끈다. 어쩌면 북한이 탈북자 문제 처리와 관련, 중국에 불만을 표하는 것일 수도 있다. 또 최근의 경제 변화에 대한 중국의 충고, 또는 낮은 수준의 압력에 대한 불만 표시일 수도 있다.
서동만= 중국을 겨냥한 움직임이라고는 보기 어렵다. 대러시아 관계는 일본 외교의 최대 실패이다. 2000년까지 평화조약을 체결하기로 했으나 끝내 이뤄지지 못했다. 이른바 '북방4도' 반환 문제가 암초였다. 고이즈미 총리는 우선 2개 섬만이라도 돌려 받으려고 했으나 좌절됐다. 대러시아 막후 협상을 맡았던 스즈키 무네오(鈴木宗男) 의원이 스캔들로 구속된 것은 보수파의 반격 때문이다. 그 후 일본의 대러시아 외교는 벽에 막혔다. 더욱이 러시아는 부시 행정부와도 관계를 유지하고 있으며 동북아에서의 영향력을 급속히 확대하고 있다. 한반도를 둘러싼 외교에서 일본은 가장 뒤져 있다. 한일 관계로 겨우 버텨 왔고 이번에 제자리 찾기를 위한 재시도에 나선 것이다.
김호섭= 고이즈미 총리의 방북 결정은 외교정책자문단의 일원인 오코노기 마사오(小此木政夫) 게이오(慶應)대 교수의 조언의 결과일 수도 있다. 그는 평소에 일본 자본이 북한의 경제 재건을 돕는다면 북한 미사일 위협은 사라진다고 주장해 왔다. 이런 정책은 2차대전 이후 일본 대외정책의 기본인 종합안보정책 노선으로의 회귀이다. 주변사태법이나 유사법제 논의 등은 오히려 기본 노선에서의 일탈이다. 고이즈미 총리의 방북이 한국의 연말 대선에 앞서, DJ 정권의 레임덕의 와중에서 이뤄지는 것도 의미가 있다. 오부치 게이조(小淵惠三), 모리 전총리와 고이즈미 총리는 그동안 DJ의 대북 포용정책 동참 요구를 거절해 왔다. DJ의 레임덕이 시작되자 태도를 바꾼 것은 우리 정부로서는 아쉬운 대목이기도 하다.
서동만= 그건 사실과 다르다. DJ 정부에서 남북 관계의 기복이 있었지만 최근 회복돼 오늘 철도 연결 합의도 했다. 오히려 이런 시기가 아니면 북일간의 본격 대화가 어렵다. 고이즈미 총리의 방북은 남북 관계 복원과 한 덩어리이다. 이런 점에서 김 국방위원장의 서울 답방에 유리한 환경이 조성되고 있다. 그의 답방은 6·15 공동선언을 이행하는 의미이자 남북 화해 분위기를 한결 공고하게 할 것이다. 북한의 태도 변화도 간과해선 안 된다. 북한은 그동안 대일 관계를 대미 관계의 종속 변수로 여겨 왔다. 이번에는 역의 접근 방법을 취했다. 대일 관계를 앞세우고 대미 관계를 뒤로 돌렸다. 평양의 국장급 회담에서 강석주(姜錫柱) 외무성 제1부상은 일본 대표단에 북미 관계 개선에 협조해 달라고 요청했다.
김호섭=북한의 태도 변화에 대한 지적에는 100% 공감한다. DJ의 포용정책도 사실은 북한의 태도변화가 전제였다. 북한이 제대로 협력하지 않아 더 이상 나아가지 못했다. 앞으로 북일 교섭에서도 북한이 국제사회의 요구에 얼마나 호응하느냐가 관건이다. 일본은 형식은 다르더라도 식민지 지배에 대해 보상하겠다는 입장이다. 북한이 납치 등 국제규범에 어긋난 행동을 저질러 온 태도에서 변화하지 않는다면 결국 고이즈미 총리의 방북은 성과가 없을 것이다. 북한의 태도 변화 여부가 양측 관계를 전망하는 전제이다.
서동만= 이번 방북은 73년 당시 다나카 가쿠에이(田中角榮) 총리가 중국을 방문, 중일 국교정상화에 이른 경위와 유사한 점이 있다. 당시 일본 국민들은 반대했으나 다나카 총리는 정치생명을 걸었다. 72년 리처드 닉슨 미대통령의 방중, 즉 닉슨 쇼크가 계기였으며 대미 독자 외교의 결과는 미국보다 6년이나 앞선 대중 수교로 결실했다. 북일 양측은 수교의 기본 방향을 정하는 데 특별한 문제가 없을 것이다. 납치 문제에는 북한이 이미 성의를 시사했고 미사일 문제도 관계가 개선되면 문제 자체가 소멸한다. 사죄와 보상 문제가 있으나 이미 타협 수준이 정해졌다고 할 수 있다. 사죄는 98년 한국 공동선언 내용을 그대로 적용하고 보상도 65년 한일 기본조약 당시의 방식이 있다. 금액이 최대 쟁점이다.
김호섭=사죄의 내용과 방식, 보상의 형식과 금액이 문제가 될 수 있으나 고이즈미 총리의 방북 일정이 잡힌 것으로 보아 양측의 타협과 수용이 어느 정도 전제됐다고 볼 수 있다. 북한의 결정에는 큰 어려움이 없다. 여론이 존재하지 않는 체제여서 김 위원장을 비롯한 소수 엘리트 집단의 태도만이 문제가 된다. 일본은 경제협력 형식의 보상을 생각하고 있다. 65년 당시 한국의 대일 청구권 규모는 무상 3억달러, 유상 2억달러였다. 당시로서는 큰 돈이기도 했지만 보다 중요한 것은 일본 민간 경제가 한국 경제에 참여한 것이었다. 마찬가지로 북한도 일본의 정부개발원조(ODA) 자금에 이어 일본 기업의 투자가 늘어날 수 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서동만= 한일 국교정상화 때와 마찬가지로 보상이냐, 경제협력이냐는 각자의 해석에 맡기는 식이 유력하다. 북한도 사죄·보상 주장에서 물러나 73년 중일 방식을 제안한 바 있다. 중국은 청구권 주장을 일절 하지 않았지만 결과적으로 거대 자금을 대중 경제협력에 쏟아 부었다. 어떤 형식이 되든 양측이 서로 양보·타협할 자세가 돼 있다. 금액은 50억∼100억달러가 흔히 거론된다. 한국의 경우처럼 10년에 걸쳐 제공하는 방법이 가능하다. 최근 북한이 부분 보상도 가능하다고 언급한 것은 북한의 타협안일 가능성이 있어 주목된다. 한편으로 일본은 중국, 베트남의 개혁·개방 이전에 경제협력에 나섰던 것처럼 사회주의 국가와의 협력 경험이 있어 대북 협력에 실무적 어려움도 없다.
김호섭= 걸림돌이 있다면 일본 국내의 논쟁이다. 식민지 보상인 대북 경제협력을 김정일 체제에서 하는 것이 일본의 국익에 도움이 되느냐의 여부가 논란이 될 수 있다. 보상 형식과 내용 등을 싸고도 격론이 벌어지고 있다. 최종적인 대북 식민지 보상이 한일 방식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으리라는 생각에는 동감이다. 북한도 경제구조 개혁에 나선 마당이어서 사회간접자본(SOC)의 확충이 시급하다. 어쩌면 북한은 SOC를 얻고, 건설 사업은 한국이 맡고, 일본은 자금을 대고 민간기업의 진출 기회를 만드는 '윈(win)―윈―윈'도 가능하다.
서동만= 중국과 베트남에 대한 일본의 경제협력은 SOC 사업에 집중됐다. 일본은 산업구조의 고도화로 북한과의 격차가 너무 커서 제조업체의 북한 진출 이익은 거의 없다. 다만 건설업체의 숨통을 터주고는 싶을 것이다. 제조업 등의 대북 경제 협력은 한국이나 중국에 맡기려 할 것이다. 이는 일본이 갈망하는 한중일 자유무역협정 실현을 위한 촉진제가 될 수 있다.
/정리=황영식기자 yshwang@hk.co.kr
사진=이종철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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