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엄령이 선포되자 시위는 서서히 누그러졌다. 6월3일 하루 동안 시위대 200여명이 부상했고, 1,200여명이 체포됐다. 학교는 문을 걸어 잠갔다. 모일 곳이 없어진 학생들은 더 이상 조직적인 투쟁을 하기 어려웠다.바로 다음날 김재규(金載圭) 장군이 만나자고 연락을 해 왔다. 덕수궁에 자리잡고 있던 계엄군의 임시 사단 본부로 찾아 갔다. 대륜중 시절 나의 스승이기도 했던 김 장군은 내가 사단장실로 들어서자 무척 반갑게 맞았다. 그리고는 "누가 엿들으면 곤란하니 잠깐 이쪽으로…"라며 내 팔을 잡아 끌었다. 김 장군은 뜰에 세워져 있던 앰뷸런스로 나를 데려간 뒤 이렇게 말했다.
"데모는 진압했지만 나라를 위해 이번 기회에 문제가 되고 있는 몇 사람을 체포해야 한다는 게 계엄군의 분위기요. 야당의 김준연(金俊淵) 서민호(徐珉濠) 의원과 김종필(金鍾泌) 공화당 의장이오. 군의 기류가 이러한데 대통령께 말씀드려 일을 순조롭게 처리할 사람은 이 의원 밖에 없을 듯하오."
김 장관은 설명을 계속했다. "김 의장은 4대 의혹사건으로 군의 불신을 받고 있고, 두 야당 의원은 한일회담에서 대통령이 일본으로부터 돈을 받았다는 허무맹랑한 발언을 국회에서 하지 않았소."
나는 사태를 빨리 수습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다. 박정희(朴正熙) 정권이 최악의 위기를 맞고 있는 만큼 어떻게 해서든지 일단은 시국을 안정시킬 필요가 있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은 몰라도 김종필 의장에게는 미리 이를 알려 주어 스스로 결단을 하도록 하는 게 낫겠다는 판단이 섰다.
나는 김 의장의 소재를 파악한 뒤 그가 머물고 있는 참모총장 공관으로 갔다. 김 의장과 김성은(金聖恩) 국방장관, 민기식(閔耭植) 참모총장, 김종갑(金鍾甲) 국회 국방위원장이 함께 있었다. 나중에 들은 얘기지만 김 국방장관과 민 총장은 그날 아침 박 대통령에게 이 같은 군의 분위기를 보고했고 그 자리에서 "김 의장에게 그 같은 상황을 직접 말해 주지 않고 뭘 하고 있나"라는 핀잔을 듣고 왔다고 한다.
내가 들어가니 그들은 차마 김 의장에게 이를 솔직하게 말하지 못한 채 변죽만 울리고 있었다. 김 의장은 대충은 돌아가는 분위기를 파악하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단도직입적으로 내가 들은 이야기를 가감 없이 전했다. 그리고는 "김 의장께서 2보 전진을 위해 1보 후퇴하십시오"라고 건의했다.
김 의장은 굳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군 전체 분위기가 다 그런 게 아니고 일부 장군들이 내게 감정이 있는 것 같소. 내가 당 의장을 물러 나면 누가 각하를 보필할 수 있겠소."
나는 재차 말을 받았다. "누가 당을 맡건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후임자가 시원찮으면 각하께서는 더욱 김 의장을 아쉬워하지 않겠습니까. 지금은 학생 데모가 워낙 심각하니 우선 나라를 살려 놓고 봐야 합니다. 나는 사심 없이 김 의장과 나라를 위해 말씀 드리는 것입니다."
다음날 청와대에서 연락이 왔다. 박 대통령은 급히 올라간 내게 어제 김 의장을 만났다는데 어떻게 됐느냐고 물었다. 이야기를 소상히 전한 뒤 나는 "아무래도 각하께서 김 의장을 불러 결단을 내리도록 하는 게 좋겠습니다"고 말했다.
그날 저녁 박 대통령은 김 의장을 청와대로 불렀다. 그리고 곧바로 김 의장의 사임을 알리는 호외가 시중에 나돌았다. 다음날 김 의장은 기자회견을 가졌다. 그는 "내가 모든 책임을 지고 물러난다"며 공식적으로 거취를 밝혔다. 며칠 뒤 정구영(鄭求瑛) 의원이 당 의장 서리에 임명됐고 김종필씨는 다시 미국으로 떠나게 됐다. 이것이 그의 2차 외유다.
6·3 사태는 결국 김종필씨가 해외로 떠나고 김준연 서민호 의원이 구속되면서 마무리돼 갔다. 한일협정은 2년 뒤인 1965년 6월22일 양국 외무장관이 참석한 가운데 일본에서 서명됐다. 8월14일에는 여야간 심한 몸싸움 끝에 국회에서 비준안이 통과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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