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첫번째 남자는 ‘0011 나폴레옹 솔로’의 주인공 로버트 본이었다. 그를 한창 좋아할 때가 초등학교 4학년때였으니 좀 빠른 편이었나? 그 후 영화 한 편 볼 때마다 내 남자는 바뀌었다. 중1때 ‘의사 지바고’를 보고는 한동안 오마 샤리프 생각만 하고 지낸 적도 있다. 할리우드 스타들로 점철된 내 남자 리스트에는 ‘벤허’의 찰톤 헤스톤도 들어있다. 요즘 뜨는 꽃미남과는 절대 아니지만 영화의 장엄한 분위기와 그의 남자다움에 가슴이 두근거렸었다.그가 얼마전 알츠하이머병에 걸렸음을 스스로 발표했다. 자신이 정신적 죽음으로 다가서고 있음을 만인 앞에 인정하는 기분은 어떨까. 미국에 사는 선배 한사람은 친정 아버지는 알츠하이머로, 시아버지는 다른 육체적 지병으로 각각 전문요양원에서 투병 중인데 두 분 병문안을 다녀올 때마다 어느 쪽이 더 나은 것인지 생각해 보곤 한다고 고백한다.
“나날이 어린애가 되어가는 친정 아버지는 몸은 너무 건강하셔. 어찌 보면 자신은 별 고민이 없는 것 같애, 자손들은 지켜보기가 힘들어도. 반면 시아버님은 육체적 고통은 극심해도 정신적으로는 너무 말짱하시지. 내가 더 늙어 어느 한쪽을 선택해야 한다면 글쎄…”
선배의 쓸쓸한 질문이 이제 남의 얘기로만은 느껴지지 않는다. 올해로 일흔여섯이 되신 친정어머니의 가장 큰 두려움은 바로 치매이다. 개성 출신 깍정이인 어머니는 무엇보다 자식들에게 폐를 끼치게 될 것이 제일 염려스러우신 것이다. 이런 어머니에게 최근 새로운 일거리가 생겼다. 둘째의 공짜 수학 과외 선생님이 되신 것이다.
수학교사로 은퇴하신 어머니는 지금도 중학교 수학 정도는 가볍게 푸시는데 수학에 유난히 자신이 없는 둘째의 수학을 돌봐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이다. 외할머니와 손녀가 나란히 앉아 ‘집합의 개념’이며 ‘경우의 수’를 공부하는 광경은 웃음이 절로 나온다. 둘째도 걸핏하면 소리를 지르거나 화를 내는 엄마 아빠보다 느긋하게 서두름 없이 가르쳐 주시는 외할머니 선생님이 훨씬 마음에 드는 눈치다. 어머니 역시 오랜만에 수학책을 잡고 씨름하는 것이 무척 즐거우신 것 같다. 늙을수록 머리를 써야 하는 거야 하시며….
3년간의 미국 생활동안 내 영어 선생님들은 주로 은퇴한 60대 할아버지 할머니들이었다. 그 중에는 전직 CIA요원도 있었고, 은발의 멋쟁이 변호사 할머니도 있었다. 전세계에서 모여든 외국인들에게 미국 문화와 언어를 열심히 가르치던 모습은 인상적이었다.
일부러 강과 산이름을 외웠던 미당 서정주 선생처럼 우리도 언젠가는 은퇴해 치매를 걱정하며 늙어갈 것이다. 평생 갈고 닦아온 실력을 친손자든 외국인이든 남에게 베풀 수 있다면 알츠하이머 예방 효과를 떠나 아름답고 생산적인 마무리가 될 터인데….
이덕규 boringmom@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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