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종로구 수송동 이마빌딩 2층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사무실. 요즘 이곳은 밤 늦게까지 전등불이 꺼질 줄을 모른다. 조사 종결시한(9월 16일)이 보름여 앞으로 다가 오면서 상당수 조사관들이 최종 조사종결보고서를 작성하느라 야근이 일상사가 됐기 때문이다.의문사위는 2년 가까운 조사 기간 동안 서울대 최종길(崔鍾吉) 교수, 한총련 투쟁국장 김준배(金準培) 씨 사건 등 검은 역사의 그림자 속에 영원히 묻힐 뻔했던 의문사의 실체를 파헤쳐 내는 성과를 거뒀다. 그러나 '아직 갈 길이 멀다'는 의문사위 안팎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의문사위의 족적, 그간의 성과들
"중앙정보부 직원이 최종길 교수를 밀었다고 들었습니다." "추락한 김준배 씨를 경찰이 짓밟는 것을 봤습니다." 최종길 교수의 타살, 1,000여 명에 이르는 젊은이들을 강제로 군에 끌고 가 '함께 학생운동한 친구를 불어라'고 고문한 녹화사업, 군이라는 조직에서 벌어진 허원근(許元根) 일병 살인사건, 경찰의 폭행으로 사망한 김준배 사건 등. 위원회의 성과로 꼽히는 사건들은 저절로 나온 것이 아니다. 당시 수사 당국이 놓쳤거나 눈을 감아버렸던 참고인과 목격자를 찾기 위해 조사관이 한 사건 당 만난 사람은 평균 100∼300여 명. 조사관들은 "권력의 치부를 드러내야 하는 사건들의 특성상, 참고인들에 대한 조사는 조사라기 보다 구걸"이라고 말했다.
조사 사건 중 가장 오래 된 1971년 신민당 지구당위원장이었던 양상석(梁商碩) 씨 의문사 조사에서는 비에 젖은 유서의 진위를 판단하기 위해 당시 현장에 내린 강수량 만큼의 빗물을 투여해 글씨의 번지는 정도를 관찰하는 실험을 하기도 했다. 조사관들은 수십 년이 지난 사건의 경우 중요 참고인은 사망하고 사건 기록조차 재대로 보관되지 않은 경우가 허다해 이처럼 지푸라기라도 잡아야 하는 안타까운 상황에 자주 부딪치곤 했다.
▶진행중 사건 53건, 갈길 멀어
위원회는 그러나 아직 규명한 것 보다는 진실을 파헤쳐야 할 것들이 더 많다. 위원회가 아직 실체를 가려내지 못했거나 결론을 내리지 못한 사건은 53건. 장준하(張俊河) 선생 사건은 중앙정보부가 사건 전날까지 장 선생을 감시하고 사건 현장에 기관원으로 보이는 의문의 남자 3명이 있었다는 정황 증거 외에는 사건의 실체가 아직 베일에 가려져 있다. 한진중공업 노조위원장 박창수(朴昌洙) 씨 사건 또한 '타살됐다'는 감정서와 당시 안기부가 접촉했다는 진술들은 나왔지만, 타살 주체는 확인하지 못했다.
의문사위가 최근 발표한 서울대생 김성수(金成洙) 씨 사건도 뇌진탕 사실이 밝혀져 타살 가능성이 높아졌지만 실체 파악에는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이처럼 '미제 사건'들은 산적해 있지만 8명의 위원들은 관련 보고서를 다 훑어보는 데 만도 시간이 빠듯하다. 위원회 관계자는 "워낙 일이 밀려 이름없는 노동자의 죽음은 소리소문 없이 묻혀 버리는 '죽음의 계급화'를 부인할 수 없다"고 털어놓기도 했다.
특히 20일 있었던 녹화사업 중요자료 소각 사건은 위원회의 권한미비 문제를 단적으로 보여준 사건이었다. 중요한 자료를 직접 보고도 위원회는 '압수수색'의 권한이 없었고, 증거인멸 가능성이 높은 핵심 피진정인을 집으로 돌려 보내야 했다. 국정원, 기무사에 대한 현장방문(실지)조사도 계속 좌절되고 있는 상황이다.
위원회 관계자는 "검은 역사의 거대한 벽에 부딪히는 느낌"이라며 "기한 연장과 권한강화는 역사를 바로 잡기 위한 기본 요건"이라고 말했다.
/이진희기자 river@hk.co.kr
■"의문사委 활동기한 연장·권한 강화해야"/시민단체 특별법 개정운동
의문사진상규명위의 조사종결 시한이 눈앞에 다가오면서 관련 시민단체들을 중심으로 조사기한 연장과 권한강화를 위한 특별법 개정운동이 확산되고 있다.
민주화운동정신계승 국민연대 등 관련 시민단체들은 최근 기자회견을 갖고 의문사진상규명위의 활동기한 연장과 조사권한 강화 등을 골자로 한 의문사 특별법 개정 발의안을 공개하고 본격적인 개정운동에 나설 것임을 공표했다. 이 발의안은 모든 사건이 종결될 때까지 위원회의 기한제한 폐지 위증을 하거나 소환에 불응한 자는 3,000만원 이하의 과태료나 5년 이하의 징역형을 부과할 수 있는 권한 신설 등을 담고 있다.
또 위원장을 특별검사로 임명하는 특별검사제 형태의 안도 제출될 예정이다. 국민연대는 30일 국회 공청회를 시작으로 의문사 특별법 개정 운동에 불을 붙일 계획이다. 국민연대측은 "계류 중인 안은 민주당 이창복(李昌馥) 의원이 재발의하고, 특별검사 안은 한나라당 이부영(李富榮) 의원이 늦어도 다음 주 내에 발의할 예정"이라며 "발의 후에는 국회 법사위 방문 등을 통해 개정안이 통과 되도록 노력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촉박한 기간과 여러 이해 기관들과의 갈등 관계로 볼 때 개정안 통과가 쉽지 만은 않은 것이 현실이다. 통과가 되더라도 '권한 강화'라는 핵심은 빠진 채 지난 두 차례 개정 때처럼 단순 기한 연장 만이 추진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이처럼 여의치 않은 상황을 감안해 일각에서는 인권위 법을 개정해 조사가 종결되지 않은 의문사 사건은 인권위로 이양하는 방안을 대안으로 제시하고 있어 주목된다.
/이진희기자
■"유족들과 손잡은 가해자 눈물 봤으면" 한상범 의문사진상규명위원장
"유족을 만난 날 밤은 마음이 아파서 잠을 설칠 때가 많습니다."
4월 18일 당시 민간조사관과 파견조사관 간의 갈등, 유족들의 시위로 홍역을 겪고 있던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위원장으로 부임, 의문사위를 이끌어 온 한상범(韓相範·사진) 위원장. 민족문제연구소 등에서 위원회와 닮은 꼴 일을 줄곧 해온 그는 우리 사회 '과거청산 노력'의 산증인이다.
"친일부터 시작해 우리는 무엇하나 재대로 청산한 적이 없습니다. 더구나 위원회가 맡은 사건의 피해자들은 독재권력 시절 약자였던 학생, 노동자들입니다. 이들마저 외면한다면 이 세대가 과연 역사 앞에 무엇을 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는 그러나 자식이나 부모의 억울한 죽음을 안고 살아온 유족들이 막연한 기대로 자신을 쳐다보는 눈빛을 접할 때마다 위원회가 해줄 수 없는 것들 때문에 마음이 쓰리다. "위증에 대한 처벌 권한조차 없이 일하는 것이 무척 힘든 게 사실입니다. 때문에 조사관들은 일반 수사관보다 10배는 더 뛰고 있습니다."
그는 정책적 발언에 제약이 있는 공무원 신분의 조사관들을 대신해 최근 대통령에게 위원회의 조사기한연장과 권한강화 건의서를 올렸고, 30일 국회 공청회 토의를 준비하는 중이다.
그에게는 위원장 직을 맡는 동안 꼭 한 가지 보고 싶은 모습이 있다. 가해자가 유족들과 손을 잡고 함께 눈물을 흘리는 모습이다. "우리가 가해자라고 찾아낸 사람들도 사실은 권력의 도구로 이용당한 희생자들입니다. 하지만 이들은 전혀 잘못을 뉘우치지 않고, 자신이 한 일이 정당했다고 착각하는 사람들까지 있습니다." 평생 살아오며 친일을 사죄하는 사람을 딱 한 명 봤을 뿐이라는 그는 "친일파나 학생 시민들에게 총칼을 겨둔 독재자들이 더 잘 사는 사회에서 누군들 잘못을 진정 뉘우치겠느냐"고 말했다.
그는 "위원회 결정 사건과 성과를 평가함에 있어 비판 세력들이 최소한 '우리와 같은 진지함'을 갖고 있기를 바란다"는 말도 잊지 않았다.
/글=이진희기자
사진=김재현기자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