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2년 8월30일 프랑스의 정신분석학자 펠릭스 가타리가 62세로 작고했다. 프랑스 정신분석학의 제4 세대를 대표하는 가타리는 자신이 속했던 라캉학파의 철학적·정치적 지평을 크게 넓힌 인물이다. 속세의 직업은 정신과 의사였지만, 가타리는 알제리 전쟁기에 격렬한 반식민주의자로 좌파 운동에 발을 담근 이래 20세기 후반 프랑스 진보 운동의 이론과 실천 양면에 자신을 일관되게 구속시켰다.그러나 가타리가 모색한 좌익적 전망은 제도권의 주류 좌파와는 거리가 있었다. 그는 사회당의 프랑수아 미테랑 후보가 당선된 1981년 대통령 선거에서 풍자만화가 콜뤼슈를 밂으로써 대다수 좌파 지식인들과 정치적으로 결별했고, 그 자신이 주도적 제창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생태주의 정치에 대해서도 그 경화(硬化) 가능성에 지속적으로 우려를 표명했다.
학생 혁명의 물결이 프랑스 전역을 휘몰아치던 1968년 가타리는 파리 8대학에서 철학자 질 들뢰즈를 처음 만났고, 이 만남은 '자본주의와 정신분열증', '천 개의 고원', '철학이란 무엇인가?' 등의 공동 작업으로 이어졌다.'반(反)-오이디푸스'라는 부제로 더 잘 알려진 '자본주의와 정신분열증'은 그 본성상 반동적일 수밖에 없는 '전쟁기계'로서의 국가에 대한 저항을가리키는 '유목민주의'나, 그 유목민주의의 기호론적 형태인 '탈영토화' 등 가타리와 들뢰즈의 철학적 상표가 된 주요 개념들을 대중화시켰다. "무의식은고아다", "오이디푸스가 유효하게 된 것, 즉 우리가 아빠-엄마를 소비하게 된 것은 자본주의와 함께다"라는 이 책의 유명한 선언을 통해 가타리와들뢰즈는 정신분석학을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로 상징되는 아빠-엄마-나의 삼각 구도에서 구출해내 좌익적 정신분석학이라고 할 만한 욕망의 정치사회학을수립했다.
고 종 석/편집위원 aromach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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