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쓰냐?그러고 보니 나는 지금까지 내가 왜 글을 쓰는지 별로 생각하지 않은 것 같다. 그런 질문을 스스로 하거나 받은 적이 아마 없었다. 있었더라도 심각하게 고려하지 않은 듯하다. 나는 그 동안 그저 글을 써왔다. 이것은 왜 글을 쓰느냐에 대한 대답에 중요한 열쇠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문학의, 또는 예술의 무목적성이나 자목적성과도 관련이 있다.
글쓰기에 대한 질문들 중에서 넷은 비교적 쉽게 대답할 수 있다. 누가 쓰냐? 내가 쓴다. 언제 쓰냐? 살아있는 동안 쓴다. 어디서 쓰냐? 내가 사는 곳에서 쓴다. 무엇을 쓰냐? 내게 일어난 일들과 내가 보고 듣고 느끼고 읽고 생각한 것을 쓴다. 나머지 둘은 서로 다른 점에서 대답하기 힘들다. 어떻게 쓰냐? 이것은 나의 평생 문제다. 쓰기는 항상 새로운 실험이다. 왜 쓰냐? 그냥 쓴다. 그냥? 무의식적으로? 맹목적으로?
어떤 사람은 노름빚을 갚기 위해서 글을 썼다. 정적을 비난하고 교황당이나 황제당을 지지하여 피렌체에 평화를 가져오기 위해서 글을 쓴 사람도 있었다. 공화정의 이상을 실현한 혁명가와 그가 단두대로 보낸 왕의 아들, 둘 다를 위해서 시를 쓴 시인도 있었다. 말하자면 우남과 사일구, 둘 다를 노래한 시인과 같다. 그는 성공회를 옹호할 때는 가톨릭을 배격했고, 로마교회로 개종한 다음에는 영국정교를 욕했다. 그는 그러기 위해서 시를 썼다. 생활비를 대준 권문세가나 왕을 위해서 글을 쓰고 또 그것을 그들에게 바치는 일은 흔했다. 돈 많은 장사치의 집에서 숙식을 하고 그를 위해서 글을 쓰는 수도 있었다. 어떤 시인은 가슴 속에서 화산이 폭발하는 것을 예방하기 위해서 시를 썼고, 어떤 여자는 목이 잘리는 것같이 느꼈을 때 살아남기 위해서 시를 썼다.
호메로스가 장군이었다면 서사시를 썼을까? 만일 그가 유능한 군인이었더라면 희랍을 위해서 트로이를 공략하는데 공을 세우지, 집에 들어앉아서 영웅들을 노래했을까? 물론 그가 기린 장수들은 벌써 몇 백 년 전 사람들이었다. 그는 군사적으로 유능 무능 간에, 시간적으로 그들 중의 하나가 될 수 없었다. 그러나 전쟁이란 항상 있는 것 아니냐? 그는 그의 시대의 전쟁의 용사가 될 수 있었다. 그가 그것이 안 된 것은 전쟁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것이 되는 것과 그의 일이 별개의 것이기 때문이었다. 종군기자는 그가 취재하는 전쟁이 아니라 그의 기사에 목숨을 건다. 보도가 뭐길래! 전장에서 산화한 기자는 그의 조국의 국익을 위해서 죽은 것이 아니다. 사실을 알리기 위해서 목숨을 버렸다. 사실이 뭐길래!
사실이 뭐냐? 진실이 왜 귀하냐? 진리가 왜 목숨을 걸 만한 값어치가 있냐? 사물의 참모습은 보기가 힘들다. 힘든 만큼 그것을 보면 기쁘다. 너무 눈부셔서 눈이 멀 정도다. 옛날 신의 모습을 보면 타 죽었다. 진리는 조금씩 그 편린을 본다. 그것도 사람의 평생이 걸린다. 돌멩이 하나, 나뭇잎 하나, 개구리 한 마리 다 못 알고 세상 뜬다.
얻기 힘든 것은 다 귀하냐? 보기 힘든 것은 다 기쁘냐? 돈은 벌기 어렵다. 그것은 금은보화와 함께 귀하다. 아름다운 여인은 흔하지 않다. 그것을 보면 즐겁다. 진리는 왜 붙잡기 힘들고, 사물의 참모습은 왜 보기 어렵냐? 욕심에 눈이 어두우면 눈이 있으되 못 보고, 귀가 먹으면 귀가 있어도 못 듣는다. 마음을 비우면 물건의 덧없음이 보인다. 욕심을 버리기가 어렵다. 그것은 거의 인간의 조건을 포기하는 것과 같다. 처자식을 먹여 살려야 하고, 비바람을 피하고, 목마름과 배고픔을 달래야 하는데, 어떻게 그것들을 가능하게 해주는 돈을 돌보듯 할 수 있으랴. 도둑질하지 않고도 기본필요를 충족할 수 있는 사람들은 마음 비우기가 쉬워서 좋겠다고도 생각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은 경우가 더 많다. 그들에게는 편익과 사치가 기다리고, 편하고 호화롭게 사는 사람들에게는 더 큰 편리와 호사가 항상 기다리고 있다.
주린 배를 채우고 벗은 몸을 바람 이슬 피하려고 저지르는 도둑질보다 자동차 타고 술 먹고 계집질하고 노름하고 명품 사재기하고 큰집 장만하고 공치기 하려고 하는 도둑질이 단연 더 많다. 가난 구제는 나라도 못한다고 하지만 거짓말이다. 조막만한 위장 채우는 데는 그리 많은 돈이 안 든다. 먹기 전의 도둑질은 생존권이다. 먹은 다음의 도둑질은 무엇이냐? 그것도 용서해야 하냐? 돈이 사람의 가치를 재는 척도인 우리 사회에서는 그것도 생존권이 되게 한다. 돈이 없으면, 있어도 많이 없으면, 많이 있어도 더 많이 없으면, 사람노릇을 할 수 없고, 사람대접을 받을 수 없다. 자본주의는 웬만큼 먹고 난 다음에도 마음 비우는 것을 참으로 어렵게 만든다. 시인들은 더러 정박아처럼 되어 처자식은 물론 자신의 앞도 가리지 못한다. 마음을 비우려고 한 대가다.
욕심을 버리는 것이 어렵지만, 그것으로 일이 끝나지 않는다. 머리 깎고 절에 들어가 면벽 삼년에 수도 십년 하면, 아마 도가 트여서 문학 같은 것은 안중에 없을 것이다. 혹 있더라도, 그의 언어는 너무 엉성해서 겨우 선문답이나 게송으로 그의 뜻을 속인들로 하여금 촌탁케 할 수 있을 뿐, 꿀먹은 벙어리처럼 온전한 통신은 불가능할 것이다. 불완전한 언어로 진리를 붙잡으려고 하는 것은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무모한 짓이다. 글쓰기는 많은 딴 세상살이와 마찬가지로, 완성이 아니라 끝없는 시도다. 그것은 설명이나 해설이 아니라 탐험이고 방황이다.
는 아무것도 모르고 평생 사업이 된 글쓰기에 뛰어들었다. 중학교 때 수업시간에 책상 밑에 감추고 읽었던 연애소설이나 책방에서 훔쳐 읽었던 삼국지가 재미있어서, 또는 고등학교 때 국어선생님의 칭찬에 고무되어서, 또는 대학교를 졸업하고 취직한 분야에서 출세할 전망이 암담해서, 또는 내가 잘났다는 것을 과시할 방법이, 아니, 내가 이 세상에 있다는 것을 나타낼 방법이 달리 없어서, 또는 그 외에 어떤 갈증 때문에, 시작했는지 모른다. 어쨌든 어떻게 해서 나도 모르는 사이에 일판이 벌어졌다.
나는 지금도 욕심이 목에까지 꽉 차서 동서남북 천지현황을 모른다. 이 세상은 나에게 혼돈으로 나타난다. 그것은 결코 그것이 아닐 것이다. 나는 거기에서 거기에 분명히 있을 원칙도 질서도 정의도 볼 수 없다. 한 사건과 딴 사건 사이의 관계가 내게는 안 보인다. 틀림없이 별들의 운행처럼 필연일 많은 일들이 내게는 우발적인 사고들이다. 나는 길을 잃고 어둠 속을 헤매고 있다. 왜 쓰느냐는 이 캄캄한 미로를 벗어나기 위해서고, 어떻게 쓰느냐는 그 길을 찾는 것과 같다. 이 세상은 그것의 의미를 그것을 볼 눈을 갖춘 사람에게 그 갖춘 정도에 따라서 조금씩 다르게 보여주는 듯하다.
지금은 없어진 승주약국 옆 중앙병원 골목에 즐비한 술집들에서 흘러나오는 혼탁한 음식냄새를 맡았을 때, 홍도에 갈 일행과의 약속시간까지 남은 시간을 메우려고 아무렇게나 탄 시내버스의 종점에서 갯지렁이와 그것을 캔 여자들을 가득 태우고 들어오는 만선을 보았을 때, 설악산에서 나오다 차를 기다리느라고 잠시 들린 어촌에서 한가롭게 떠있는 작은 오징어잡이 배들을 보았을 때, 백수 친구가 값비싼 책 한 질을 가지고 와서 사라고 하고 어렸을 때 친형제처럼 지낸 고종 사촌들의 어른이 된 모습들이 떠올랐을 때, 전문학교 교장이 식목일에 학생지도 안하고 땡땡이 친다고 노발대발했을 때, 지금은 유원지가 된 지리산의 오지에서 쓰러져가는 폐가를 보고 남원의 저자를 하릴없이 거닐었을 때, 가령, 그런 때, 나는 알수 없는, 그러나 호리반푼의 착오도 없는, 운명이 내 눈 앞에 그 모습을 드러내는 섬광을, 또는 미광을 보았다. 달을 그리되 달을 그리지 않고 구름을 그리는 것은 구름에 뜻이 있는 것이 아니라 달을 보이게 하기 위해서다. 구름을 열심히 그리면 사람들은 구름이 아니라 달을 볼 것이다. 어디서 읽은 이야기다.
● 연보
1936년 전남 순천 출생
1962년 서울대 영문과 졸업·단편소설 '후송'이 '사상계' 신인상에 당선
1968∼2002년 2월 전북대 영문과 교수
단편집 '강' '가위' '토요일과 금요일 사이' '철쭉제' '붕어' '베네치아에서 만난 사람' 장편 '달궁' '달궁 둘' '달궁 셋' '봄꽃 가을열매' 연작소설 '용병대장' 산문집 '지리산 옆에서 살기' 등
한국문학작가상(1976) 월탄문학상(1983) 한국일보문학상(1986) 동서문학상(1995) 김동리문학상(1998) 대산문학상(1999) 이산문학상(2002) 등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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