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9년 8월28일 제2 공화국 총리를 지낸 장면이 인천에서 태어났다. 1966년 몰(歿). 장면은 좋은 교육과 탐스러운 경력을 거쳐 한 나라의 최고 지도자가 되었다. 1925년 미국 맨해튼 가톨릭 대학을 졸업한 그는 광복 이후 화려한 경력에 힘입어 외국 대학 여러 곳에서 명예 법학박사 학위를 받았다.부통령 시절인 1956년 9월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저격을 받아 가벼운 상처를 입은 것을 제외하면, 5·16 군사반란 이전까지 정치 역정도 순탄했다. 그는 제헌국회의원을 거쳐 초대 주미 대사를 지냈고, 이승만 밑에서 잠시 국무총리로 일했으며, 야당으로 돌아선 뒤에도 감투를 벗은 적이 거의 없다.
그러나 장면에 대한 평가는 넓은 스펙트럼에 걸쳐있다. 긍정적 평가의 핵심은 그가 민주주의자였다는 데 있을 것이다. 장면에 대해 언급하는 국내외의 많은 문헌들은 그가 그 세대 한국 정치인으로는 매우 드물게 진지한 민주주의자였다는 데 동의하고 있다. 사실 그가 이끈 제2 공화국은 대한민국 역사에 기록된 가장 자유롭고 민주적인 시절이었다.
그러나 이 독실한 가톨릭 신자는 친미사대(親美事大)의 한 표본이었다.
브루스 커밍스는 저서 '한국의 양지(陽地)'에서 미국 중앙정보국(CIA) 문서를 인용하며 장면이 제2 공화국 정부를 이끄는 동안 미국 대사관과 서울 주재 CIA 책임자와 상의 없이 중요한 조처를 취한 적이 거의 없었다고 쓰고 있다. 게다가 장면은 민주주의 국가의 최고 권력자로서 너무 유순했다. 그 유순함은 군사반란이라는 국가변란 상황에서 무책임으로 이어졌다. 총을 들고 반란군에게 맞서다 살해당한 칠레 대통령 살바도르 아옌데의 반 만큼이라도 장면이 강건했다면, 한국 민주주의의 역사는 크게 달라졌을지 모른다.
/고종석 편집위원 aromach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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