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중순 경기 성남시 분당구 율동 그의 자택을 찾아갔을 때 그는 기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저 정원에 떨어지는 여름 햇살 좀 봐. 참 보기 좋지? 내일이면 병원에 다시 들어가야 하는데 이젠 두려워. 용기가 안나. 그냥 이곳에서 저 햇살을 계속 보고 있으면 안 될까?"그의 염려대로 그는 그곳 병원에서 불귀의 객이 되고 말았다. "어떻게 살아온 이주일인데 이까짓 폐암 하나 못 이기겠어?"라던 그의 다짐은 허사가 됐다. "오 필승 이주일"을 외치던 젊은이들의 힘찬 성원도 모두 소용없는 일이 됐다. 폐암이란 놈은 '코미디의 황제'를 너무나 매정하게 앗아갔다.
고인은 본명인 정주일(鄭周逸)보다 예명인 이주일(李朱一)을 사랑했다. 평소 "국회의원 정주일보다 코미디언 이주일일 때가 행복했다"고 말한 그였다. 3평 남짓한 병실에 누워 있으면 "정 의원님, 여기에 서명하시죠"라고 말하던 국회 사무처 직원들보다, "이주일 아저씨, 사인 해 주세요"라고 말하던 동네 꼬마들 생각이 더 많이 난다고 말했다.
'코미디의 황제'가 대중에게 처음 알려진 것은 1980년 2월 TBC '토요일이다 전원 출발'을 통해서였다. 의사 역을 맡아 죽어가는 환자의 눈 대신 자신의 눈을 까보이며 "운명하셨습니다"라고 말하는 천부적 임기응변을 발휘, 방청석의 폭소를 자아냈다. 이후 꼭 2주일 만에 스타가 됐다고 해서 예명도 '이주일'로 지었다.
그는 승승장구를 거듭했다. 방송사와 영화사에서는 그를 데려가기 위해 몸싸움까지 벌였고 그는 1980년대 국내에서 가장 유명한 연예인이 됐다. 1981년부터 4년 연속 연예인 납세 1위를 기록할 정도로 돈도 많이 벌었다. 1982∼86년 한국일보 미주지사가 주관한 연예인들의 미주순회공연 당시 그는 언제나 '초청 1순위'였다. 그는 한국의 보브 호프이자 자니 카슨이었다.
그러나 그가 이처럼 스타가 된 것은 결코 2주일 만에 이뤄진 것이 아니었다. 1964년 제27사단 군예대 제대 후 그는 약장수 사회자, 유랑극단 보조 MC, 밤무대 MC 등 무려 18년여 동안 기나긴 무명시절을 보내야 했다. 그의 얼굴 때문에 주연MC 자리가 번번이 거절될 때마다 그는 "못 생겨서 죄송합니다"라고 말하며 머리를 숙여야 했다. 그 시절 오죽 배가 고팠으면 자장면에 물을 가득 부어 최대한 불려서 먹었을까. 그는 이 시기를 '배고픈 광대의 서커스 인생'이라고 불렀다.
그래도 그때가 좋았다. 1992년부터 시작된 14대 국회의원 시절은 그에게 '지루하고 재미없는' 4년이었다. 출발은 좋았다. 고 정주영(鄭周永) 회장의 권유로 경기 구리시에 통일국민당 후보로 출마, 압도적인 표차로 국회의원이 됐다. 한국 최초로 코미디언 출신 국회의원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그는 "국회의사당에 들어서는 순간 '목에 힘이 들어간다'는 말을 처음으로 실감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동료 의원 어느 누구도 '국회의원 정주일'을 환영해주지 않았다. 고인은 평소 "그들은 '아무나 국회의원이 되느냐?'는 식으로 나를 대했다. 나는 그들에게 영원한 코미디언일 뿐이었다. 심지어 다른 당 의원의 당선 행사장에도 불려가야 했다"고 술회했다. 그럼에도 그는 1994년 국회 교육청소년위원회 국정감사에서 한 일간지가 선정한 '국감 베스트 의원 5'에 들 정도로 열성을 다해 의정생활에 임했다.
고인은 또한 진정으로 축구를 사랑한 축구인이었다. 춘천고 재학시절 박종환(朴鍾煥) 감독과 함께 축구부에서 활동한 그는 1983년 잔디구장 건립기금으로 1,000만원을 대한축구협회에 쾌척했다. 투병 중에도 월드컵 경기장을 찾은 그는 한국 대표팀이 16강을 거쳐 8강, 4강에 오를 때 "이제 더 이상 여한이 없다"며 감격해 했다. 그러면서도 축구 열기를 잇기 위해서는 원로 축구인을 제대로 대접해야 한다는 충고도 잊지 않았다.
그러나 역시 무대에 섰을 때 그는 가장 빛났다. 1988년 12월 서울 힐튼호텔에서 열린 그의 디너쇼에서 김우중(金宇中) 당시 대우그룹 회장이 "내 평생 이렇게 웃어보기는 처음"이라고 말할 정도였다. 1960년대 말 친구 방일수(方一秀)씨와 함께 개발한 독특한 엉덩이 춤 '수지Q'를 추고, 걸쭉한 야한 농담으로 관객들에게 한아름 폭소를 선사했을 때 그는 누구보다도 행복했다.
전국민을 울리고 웃겼던 그를 하늘이 시기했던 것일까. 그는 지난해 10월 느닷없이 말기 폐암 판정을 받았다. 몸이 좀 무거워 받아본 종합검진 결과였다. 이때부터 시작된 투병생활. 머리카락은 점점 빠지고 몸은 앙상해졌지만 그는 영원한 '코미디언 이주일'이었다. 병문안을 온 지인들에게 "이렇게 많이 모였으니 미리 조의금을 거둬야겠다"며 농을 건넬 정도였다.
고인은 뜨거운 여름 햇살을 뒤로 한 채 떠났다. 그러나 엉덩이를 뒤로 빼며 '오리걸음'을 걷던 그의 모습, 국정감사 현장에서 장관들에게 불호령을 내리던 그의 모습은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담배 좀 제발 끊으세요"라는 애절한 호소와 함께.
/김관명기자kimkwmy@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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