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이주일씨는 평소 이런 말을 자주 했다. "내가 회고록을 쓴다면 그 제목은 '못 생겨서 죄송합니다'가 될 것"이라고. 고인이 3월 한국일보에 '나의 이력서'를 쓰기로 결정하면서 처음 꺼낸 말도 '못 생겨서 죄송합니다'였다. 무명 MC에서 '코미디의 황제'라는 칭호를 받을 때까지 그는 어떤 말을 남겼고 그 수많은 어록 속에는 어떤 사연이 숨어있을까.고인은 우선 외모로 숱한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고인 표현을 빌리자면 "주저 앉은 코에 500여 개에 달하는 머리카락뿐인" 외모였다. 70년대 중반 운 좋게 하춘화 쇼 MC자리가 생겼지만 그 외모 때문에 퇴짜를 맞았다. 1979년 MBC '웃으면 복이 와요'에 출연했을 때에도 "어디 그런 얼굴을 TV에 출연시키느냐"며 시청자로부터 항의를 받아야 했다. 이런 그가 밤무대의 황제가 됐을 때 그는 자신 있게 말했다. "못 생겨서 죄송합니다. 그런데 가까이서 보시면 더 못 생겼습니다."
그러나 그가 유명해지기 전까지는 '뭔가 보여드리겠습니다'라는 절박한 심정의 과도기를 거쳐야 했다. 1980년 1월 TBC 스튜디오에서 아무리 청소를 열심히 하고 커피 심부름을 해도 아무도 거들떠 보지 않던 그 시절, 그는 지나가는 사람마다 붙잡고 이 말을 하고 싶었다. 마침내 '토요일이다 전원출발'에 출연했을 때 그는 결국 사회자 곽규석씨에게 "뭔가 보여드리겠습니다"라고 말했다. 훗날 국회의원으로 활동하면서 그를 짓눌렀던 말도 '뭔가 보여줘야 하는데'였다.
지금의 30, 40대라면 누구나 기억하는 '일단 한번 와 보시라니깐요'. 80년대 초 밤업소 CF를 통해 퍼뜨린 이 말은 고인 특유의 어눌한 억양과 맞물려 당시 전국민의 입에 오르내린 최고의 유행어였다. 고인 자신도 "동네 꼬마들까지 이 말을 입에 달고 다닐 때가 내 인생의 황금기였다"고 술회했다.
그러나 1980년 10월 황금기를 구가하던 그에게 갑자기 방송출연 정지라는 청천벽력이 떨어졌다. "20년 만에 겨우 산 정상에 오르니까 5, 6일만에 하산하라"는 격이었다. 이때 그가 힘없이 자조적으로 내뱉은 말이 '조용히 살고 싶습니다'였다. 국회의원 출마를 전후해 홍콩으로 강제 출국했다가 다시 제주도로 잠행하면서 그가 수없이 되풀이 한 말도 '조용히 살고 싶습니다'였다.
고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의 권유로 뛰어든 정치인 생활도 수많은 어록을 남겼다. 14대 국회의원 선거 마지막 유세 날 고인은 "이주일이 아니고 정주일입니다"를 수없이 외쳤고, 의정생활을 마쳤을 때는 "4년 동안 코미디 공부 많이 하고 갑니다"라고 잘라 말했다. 그 4년이 얼마나 질렸으면 "정치 하겠다는 후배 코미디언들이 있으면 도시락을 싸 들고 다니며 말리겠다"고 했을까.
이러한 수많은 어록은 결국 올해 초 TV를 통해 방송된 금연캠페인으로 마감했다. 산소호흡기를 낀 채 초췌한 모습으로 옛날 팬들 앞에 나타난 코미디의 황제. 그는 이렇게 절규했다. "담배 맛있습니까? 그거 독약입니다. 저도 하루에 두 갑씩 피웠습니다. 이젠 정말 후회합니다."
/김관명기자 kimkwmy@hk.co.kr
■박종환 한국여자축구연맹 회장/사랑하는 친구 주일이 영전에
무슨 말을 하겠냐. 네가 저 세상으로 떠난 마당에 내가 무슨 말을 하겠냐. 고이 잠들고 편히 가라는 말밖에는.
바로 3일 전이었다. 너는 모르겠지만 나는 18일 동안의 미국 출장을 마치고 곧바로 일산 국립암센터로 달려갔었다. 제수씨가 울며 말하더구나. 제발 보지 말라고. 아무도 못 알아볼 테니 마음만 아플 것이라고. 그러나 나는 듣지 않았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 만큼은 알아볼 것이라고 믿었다. 모든 고달픔 온 몸으로 참으며 같이 살아온 너와 내가 아니더냐.
중환자실 병상 위에 눈을 감은 채 곤히 잠들어 있던 너. 나는 "주일아, 나 왔다. 종환이다"라는 말밖에 할 수 없었다. 그 사이 왜 그렇게 야위어야 했냐. 네 이마를 쓰다듬으면서, 네 손을 꼭 잡으면서 나는 "내가 왔다"는 말밖에 할 수 없었다. 네가 살며시 눈을 뜨고 무슨 말을 하려는지 식은땀까지 흘리며 몸을 움직였을 때 나는 결국 울고 말았다. "주일아, 힘들게 그러지 마라. 그럴수록 더 힘든 거란다." 병실 문을 나설 때도 내가 한 말은 "주일아, 나 간다. 또 올게"뿐이었다.
중환자실에서 40여 분 동안 너를 지켜보면서 나는 많은 생각을 했다. 춘천고 축구부 시절 서로 배고픔을 참아가며 공만 찼던 우리, 고교 졸업 후 10여년 만에 동창모임에서 만나 밤새도록 술잔을 기울였던 우리. 내가 1984년 LA올림픽 축구 예선전에서 고배를 마시고 실의에 빠졌을 때 "술 좀 그만 해라"라며 큰 소리 치던 사람이 바로 네가 아니었더냐.
1991년 11월에는 아들 하나 저 세상에 먼저 보내고 얼마나 힘들어 했었니. 영안실 차가운 바닥에 둘이 앉아 '잊자고, 잊으려 애쓰자'고 얼마나 많은 다짐을 했었니. "네 팔자가 그런 걸, 네 아들 놈 팔자가 그런 걸 어떻게 하겠냐"는 내 말에 술잔만 비우던 너. "너나 건강해라"라는 내 말에 또 한번 울던 그 때 네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누가 그 슬픔을 알 수 있겠냐. 그 때 그 후유증 때문에 네가 몹쓸 병에 걸린 것이 아니라고 누가 장담할 수 있겠냐. 지난달 몸에 좋다는 생수 10박스를 싸 들고 네 분당 집을 찾아갔을 때 너는 말했지. "이거 마시면 낫는 거야?"
주일아, 고생 많았다. 이제 편히 가라. 네 아들이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어서 가라. 사랑하는 친구야, 이 세상 모든 미련과 걱정, 훌훌 털고 편히 가라. 다시는 볼 수 없겠지만 저 세상으로 편히 가라, 친구야.
■이주일 연보
1940년 강원 고성군 거진면 거진리 출생
60년 춘천고 졸업
62∼64년 27사단 군예대 복무
62년 군 복무 중 제화자(諸花子)씨와 결혼
64∼68년 지방 유랑극단에서 보조MC로 활약
72∼79년 유랑극단·하춘화 쇼·김추자 쇼·밤업소 등에서 MC로 활약
79년 MBC 코미디 프로그램 '웃으면 복이 와요'를 통해 첫 TV 출연
85년 1∼7월 한국일보에 칼럼 '뭔가 말 되네요' 연재
91년 11월 아들 창원(昌元·당시 28세) 교통사고로 사망
92년 3월 1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경기 구리시에서 통일국민당 후보로 출마, 당선
96년 4월 SBS '이주일의 투나잇 쇼'로 방송 복귀
2001년 10월 폐암 판정
2002년 2월 금연홍보대사 위촉
2002년 3월18일∼7월24일 한국일보에 회고록 '나의 이력서' 연재
출연작 : '토요일이다 전원출발' '코미디 출동' '현장 쇼 주부만세' (이상 TV), '못 생겨서 죄송합니다' '뭔가 보여드리겠습니다' '얼굴이 아니고 마음입니다' '평양 맨발'(이상 영화)
수상 : 86년 MBC 코미디 부문 최우수연기상, 2001년 MBC 방송연예대상 특별공로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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