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3년 국내 정국은 여전히 어수선했다. 나는 계속 최고회의에 출입하고 있었다. 2월25일 김종필(金鍾泌) 중앙정보부장이 외국 방문길에 올랐다. 요즘도 흔히 얘기되는 '자의반 타의반' 외유로 공화당 창당 과정에서 빚어진 내부 갈등이 원인이었다. 공화당 창당을 주도한 김 중앙정보부장은 새나라 자동차 사건, 증권 파동, 워커힐 사건, 빠찡꼬 사건 등 4대 의혹 사건의 몸통으로 지목됐다.김 중앙정보부장이 한국을 떠난 다음날인 2월26일 민주공화당이 공식 출범했다. 그리고 그 이튿날인 2월27일에는 박정희(朴正熙)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민정 불참을 선언하는 이른바 2·27 선서식을 거행했다.
3월5일 박 의장은 강원 지역 시찰에 나섰다. 최고회의 출입 기자들은 미리 춘천에 도착, 춘천 미군 비행장에서 박 의장 일행을 기다렸다. 나는 민기식(閔耭植) 1군 사령관과 이런 저런 이야기를 했다. 그런데 민 사령관의 입에서 뜻밖의 이야기가 나왔다. "정치가 안정돼야 군도 안정이 되고 안보에도 허점이 없을 텐데…. 일단 정부에 나갔던 군인들은 그대로 민정에 참여하는 게 낫지, 군에 복귀한다면 군 지휘 체계에 복잡한 문제가 발생할 것 아닙니까?"
일주일 전에 나왔던 박 의장의 민정 불참 선언과는 정반대의 분위기였다. 나는 급히 숙소인 여관으로 돌아와 전화로 기사를 불렀다. '민기식 사령관 등 일선 장성들, 박 의장의 민정 참여 희망'이라는 내용이었다. 동아일보는 이 기사를 1면에 크게 취급했다.
기사가 나가자 서울에 있던 김종오(金鍾五) 육군참모총장이 민 사령관을 찾는 등 한바탕 소동이 일어났다. 김 총장은 박 의장 등의 민정 불참과 군 복귀를 희망했던 사람들이다.
민 사령관은 사태가 커지자 "나는 그런 말을 한 적이 없고, 이만섭 기자가 그렇게 썼을 뿐"이라고 발뺌을 했다. 그러자 김 총장은 "그러면 이만섭 기자를 구속, 조사해 진위를 가리자"며 내가 묵고 있는 여관에 헌병을 보내 연행하려 했다.
또 한번의 필화 사건이 일어날 판이었다. 다행히 이는 이후락(李厚洛) 공보실장이 나서면서 해결됐다. 나를 보호하려는 동료 기자들과 헌병들간의 실랑이가 진행되는 동안 이 사실을 전해 들은 이 실장이 중앙정보부 강원도 지부장 엄모씨를 보냈던 것이다.
다음 날 춘천에서 원주로 가는 길에 나를 만난 박 의장은 툭 농담을 던졌다. "이만섭 기자, 아직 안 잡혀갔구먼." 그러나 나는 박 의장의 얼굴에서 긴장된 표정을 읽을 수 있었다. 짐작은 틀리지 않았다. 박 의장은 원주 모 부대에서 영관급 장교들이 모인 자리에서 충격적 발언을 했다. 이른바 '원주 발언'이다. "이 나라는 몇몇 정신 차리지 못한 정치인들을 위해 있는 나라가 아닙니다. 정치인들이 국민에게 한 약속을 이행하지 않아 정치적 위기가 도래한다면 이를 못 본 체하는 것이 애국적 행동인지, 아니면 방관하지 않는 것이 애국적 행동인지 나는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모든 신문이 이를 1면 톱기사로 다룬 것은 당연했다. 정치에 혼란이 생기면 군사 정부는 방관을 하지 않을 것이란 경고인 동시에 민정 참여를 심각하게 고려하고 있다는 언질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일련의 과정을 거친 뒤 박 의장은 3월16일 군정 4년 연장을 전격적으로 제의한 뒤 이를 국민투표에 부치겠다고 발표했다. 곧바로 야당을 중심으로 군정 연장 반대 데모가 터져 나왔다. 여론이 심상치 않게 돌아가자 박 의장은 4월8일 국민투표를 9월까지 보류하겠다고 한 걸음 물러났고, 그 뒤 우여곡절 끝에 박 의장과 5·16 주체세력은 민정 참여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그해 8월 30일 강원도 지포리에서 "다시는 이 나라에 본인과 같은 불행한 군인이 있어서는 안된다"는 유명한 고별사를 끝으로 군에서 예편한 박 의장은 군복을 벗은 후 곧바로 공화당에 입당, 10월15일의 대통령 선거에 나서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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