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처럼 일요일을 집에서 누워서 TV 채널과 씨름을 하고 있는데 전화가 왔다. 연기자이자 배우인 김인문씨다. "점심이라도 한번 해야 하는데 시간이 안난다, 미안하다" 이런 내용이었다. 요즘 작업 안 하시냐는 질문에 "몇 개 했어, 쪼끄만 거. '피아노 치는 대통령'(주점 주인) '철파태(철없는 아내와 파란만장한 남편, 그리고 태권 V 소녀'(욕잘하는 매니저) 그리고 뭐 '도둑 맞곤 못살아'에도 그냥 한 컷 나오는 거…" "드라마도 '오렌지'(SBS)는 끝났고, '이색극장'(KBS2)도 하고 있어." '쪼그만 거'라는 데 가짓수는 참 많다.내공일까. 신세대 배우들과 함께 단조로운 세트장을 왔다 갔다 하면서도 그들과 호흡을 맞추는 데 전혀 어려움이 없는 이가 바로 김인문이다.
그는 연기인생 30년이 넘도록 스님역할을 신기하게도 한번도 못해봤다며 '달마야 놀자'의 노스님 역을 흔쾌히 허락했었다. 처음으로 머리를 자르고 2개월이 넘도록 촬영기간 내내 절에 머물며 든든한 어른 자리를 지켰다. 10여명의 소위 잘 나가는 젊은 배우들에게는 구수한 농담으로, 촬영장을 빌려준 절의 스님들과는 동네친구처럼 지내며 영화를 찍는 기간 내내 그 어느 스태프도 할 수 없는 일을 해내 든든하게 해주었다.
밤마다 모기향을 피워 놓고 옥수수를 먹으며 많은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나눠주던 그는 절에 놀러 온 불자들이나 절에 상주하는 보살들에게 최고의 인기를 누리던 배우였다. 물론 주변 식당의 아주머니들에게도 인기 짱. 촬영이 끝나자 눈물의 이별을 할 만큼 촬영기간 내내 모두에게는 노스님 혹은 이웃집 오빠 같은 존재로 남아있다. 건달과 스님의 대결로 자칫 가벼워질 수 있는 영화에 든든한 무게추가 된 것은 해탈한 듯, 초월한 듯한 주지스님의 역할이 컸는데, 그 주지 스님 역할을 김인문이 딱 해냈다.
농대를 졸업한 뒤 면사무소에서 주사로 근무하던 젊은 시절, 언제나 빳빳한 흰 와이셔츠에 자전거를 타고 출근을 했었는데 그때 동네 처녀들이 정신을 못 차리고 흠모했었다는 이야기나 영화배우가 되고 싶어 신상옥 감독과 김수용 감독의 집 앞으로 출근했던 이야기는 들을 때마다 감동적인 '사건과 실화'다. 그가 젊게 사는 비결 중 하나가 바로 젊은 사람들과의 그 어떤 대화도 가능하고 누구하고도 막히지 않는 의사소통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장소섭외 문제로 힘들어 하는 제작부를 대신해 소주 한잔으로 가볍게 문제를 해결하는 노하우는 방송국 내에서도 아주 유명하다. 여전히 수많은 영화 속에서 구수한 아버지로 등장하고 시나리오를 분석하는 능력이 누구보다 날카로운 그는 주변 사람들에게 언제나 시들지 않는 에너지를 그대로 전달해 준다. 영화 개봉때는 포스터에 당신 얼굴이 빠져 너무 서운했었다며 야단을 치기도 했지만, 다시는 같은 말을 반복하지 않는 깔끔한 성격의 소유자. 어른을 모셨다기보다는 좋은 선배를 만났다는 추억을 남기는 사람이다.
/영화컬럼니스트 정승혜 amsajah@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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