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형경의 소설 '사랑을 선택하는 특별한 기준'을 읽다가 흥미로운 인물을 발견했다. 37세의 건축가 세진. 독자적인 사무실을 운영하고 업계에서 인정도 받으면서 별 문제없이 살아가던 그녀가 새 집에 이사한 뒤로 이유없이 아프기 시작했다. 종합 검진을 받아보고 한의사를 찾기도 하지만 상황은 점점 나빠졌다. 스님, 풍수학자, 도교 수련자, 정신분석 의사 등을 만나 굿도 해보고 온갖 민간요법에 의존해보기도 한다. 그러면서도 친구에게는 이렇게 말한다. "내게 한 가지 기준이 있는데, 그것은 어떠한 경우에도 논리적으로 이해할 수 있고, 과학적으로 납득할 만한 방법만 선택한다는 거야." 세진의 태도가 모순된다고 비난할 생각은 없다. 다만 과학에 대한 그녀의 단호한 선언과 그 뒤에 어둡게 흔들리는 불안과 방어본능은 기억해둘 만하다.알프레드 화이트헤드(1861∼19471·사진)의 명저 '과학과 근대세계'는 우리의 삶을 지배하고 있는 과학을 심판대에 올린다. 화이트헤드가 보기에 자연과학과 비극은 거의 비슷한 시기에 발전했다. 자연철학과 '오이디푸스 왕' '엘렉트라' 같은 비극이 BC 5세기 전후 잇따라 나왔고, 뉴턴의 '프린키피아'와 셰익스피어의 '햄릿'도 17세기에 나란히 나왔다. 화이트헤드는 이처럼 비극과 자연과학이 동시에 발전한 것은 양자가 동일한 믿음 위에 서 있었기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그렇다면 과연 그들은 무엇을 믿었던가?
세계는 주변 여건들과 무관하게 존재하는 단단한 물질들로 이루어져 있으며, 확고한 인과관계(법칙)에 따라 운행된다는 믿음이 그것이다. 이러할 때 과학의 임무는 궁극적인 물질을 찾아내고 세계가 합리적으로 운행되는 법칙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런 태도가 뭐 잘못됐느냐고 물을 독자에게 화이트헤드는 질량에 관한 에피소드를 들려준다. 뉴턴에게 질량은 온갖 변화 가운데서도 불변하는 것으로 이미 상정되어 있었다. 그에게 문제는 물체의 질량과 그 가속도를 이용하여 외적인 힘의 크기를 계산하는 일이었다. 그런데 정작 질량 불변에 대한 증명은 1세기 뒤인 라브와지에에 와서야 비로소 이루어진다. 사실을 관찰하다보니 법칙이 발견된 것이 아니라, 믿음을 증명해줄 사실이 발견될 때까지 계속 관찰하고 실험했던 것이다.
마찬가지로 비극의 본질은 흔히 생각하듯이 불행한 사건들을 보여주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사물의 냉혹한 작용이 지니는 엄숙성을, 그 불가피성을 그려내는 데 있다. 이렇게 보면 BC 5세기와 17세기에 물리학의 법칙들은 곧 운명의 섭리가 될 수밖에 없었다. 불변의 법칙에 대한 믿음은 그것을 찾아내겠다는 과학의 열정과 함께 거기서 벗어날 수 없다는 절망(비극)을 끊임없이 생산했던 것이다. 세진 안에서 단호한 결의와 어쩌지 못하는 불안이 공존할 수 있었던 것은 오히려 당연한 일이다.
화이트헤드가 진단하는 현대는 17세기 과학정신의 자장(磁場)에서 멀리 벗어나 있지 않다. 유전자 지도 한 장으로 인간과 생명의 비밀이 모두 풀릴 것처럼 믿는 시대가 바로 현대이기 때문이다. 그는 과학 문명의 이러한 편협함이 철학에 의해 비판되고 보완되어야 한다고 역설한다. H. 리드가 '과학과 근대세계'를 "데카르트 이후의 지배적인 사고방법을 문제 삼는 최초의 시도"라고 높이 평가했던 것도 이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는 과학에 또 하나의 얼굴이 있었음을 기억한다. 다윈이나 아인슈타인의 경우처럼 기존 이론을 수정하는 주장이 제기되는 만큼 과학은 전진해오지 않았던가. 그런 점에서 과학은 스스로를 부정할 수 있는 힘이며, 그를 통해 세계의 변화를 직시할 수 있는 위대한 정신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지난 400년간 존속해온 과학의 근본 전제에 대해서도 문제 삼지 못할 이유가 없다. 주변 여건과 무관한 물질이라는 것이 있을 수 있는 걸까? 또 세계는 과연 합리적인 법칙에 따라 운행되는 걸까? 화이트헤드는 두 번 고개를 가로젓는다. 그리고는 홀로 고립되어 존재하는 물질이란 우리의 상상 속에서만 가능하다고 말한다. 또한 우주 만물은 자체 내에 창조성을 가지고 있다고, 따라서 우주는 "끊임없는 창조적 변신을 통해 두 번 다시 동일할 수 없다"고 역설한다. 과학이 불변의 세계라는 주문에서 벗어난다면 세계는 매순간 새로워지는 모습을 그에게 드러낼 것이다. 그 순간 과학은 더 이상 창백한 법칙들의 창고이기를 그치고 새로운 사건들에 경이로워할 줄 아는 능력으로 탄생할 것이다. 우리가 어린 시절 꿈꾸던 과학자의 모습도 바로 그런 것이 아니었는지.
박 성 관 수유연구실+연구공간 '너머'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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