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6 이듬해인 1962년, 정국은 급변했다. 3월16일 국가재건최고회의는 정치활동정화법을 공포했다. '참신한 정치도의를 정립하기 위해' 정치 활동을 하려면 최고회의에 설치된 정치정화위원회의 적격 심사를 받도록 한 법이었다. 말이 정화이지 사실은 규제가 목적이었다. 윤보선(尹潽善) 대통령은 이 법에 반대한다는 뜻을 밝힌 뒤 3월23일 대통령직에서 물러났고, 박정희(朴正熙)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대통령 권한 대행이 됐다.이 해 가을 어느 날, 나는 기자로서 박정희 의장과 처음으로 일대일 대면을 했다. 최고 실력자와의 단독 회견이었다. 이는 5·16 이후 내외신 기자를 통틀어 처음이었다.
하루는 김성열(金聖悅) 정치부장이 나를 불렀다. "박 의장이 강원도 화진포에서 실시하는 해병대 상륙작전에 참석한다고 하니, 단독회견을 한번 해 보는 게 어때?" 쉽지는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한번 부딪쳐보기로 했다.
나는 국방부 출입 기자단과 함께 화진포로 갔다. 훈련이 진행되는 동안 박 의장을 가까이서 보기는 역시 만만치 않았다. 그러나 훈련 후 박 의장이 군함을 타고 울릉도를 시찰한다는 계획을 알아낼 수 있었다.
나는 이후락(李厚洛) 공보실장에게 미리 얘기를 했다. 먼저 정공법을 택한 것이다. "군함에 들어가 박 의장과 단독 회견을 하려하니 좀 도와주시오." 이 실장은 확답을 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딱 부러지게 안 된다고 거절한 것도 아니었다. 최고회의 출입기자 중 최고참인 내 부탁을 매몰차게 뿌리칠 수 없었고, 박 의장과 인터뷰를 주선하기도 곤란했기 때문이다.
훈련이 끝나자 국방부 출입기자들은 서울로 돌아갔다. 나는 몰래 남아 있다가 박 의장이 탈 군함에 올라갔다. 경호요원들이 막았지만 나는 "이후락 실장에게 미리 허락을 받았다"며 슬쩍 둘러대 위기를 넘겼다.
조금 있으니 박 의장이 배에 올랐다. 이맹기(李孟基) 해군참모총장, 민기식(閔機植) 1군 사령관, 이후락 실장 등이 뒤를 따라왔다. 나는 어색한 분위기에 개의치 않고 먼저 인사를 했다. "동아일보 이만섭 기자입니다."
박 의장은 못마땅하다는 표정을 나를 보더니 이렇게 말했다. "요즘 신문이 문제야. 특히 동아일보가. 신문은 선동만 해요. 쌀값이 오르면 1면 톱으로 쌀값 폭등이라고 보도하니 더 오르지 않소."
나는 질세라 대꾸했다. "그게 그렇지 않습니다. 적절한 대책을 세우라고 촉구하는 것입니다. 사실 보도야말로 신문의 사명 아닙니까."
나는 말이 나온 김에 잘 됐다 싶어 필화사건을 끄집어 냈다. "전에 윤보선 대통령이 이야기 한 것을 그대로 보도했는 데도 육군 형무소에 잡혀간 적이 있습니다. 혁명 정부의 언론 정책과 시각에는 문제가 있습니다." 그러자 박 의장은 미안했던지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
울릉도에 도착한 다음날 박 의장 일행은 시찰을 마친 뒤 해변가 다방에서 손국수를 시켜 점심을 먹고 있었다. 내가 뒤늦게 다방에 들어서자 박 의장은 나를 불러 옆 자리에 앉혔다. 박 의장은 "어제는 내가 좀 심하게 얘기한 것 같아 미안하오." 나는 그 순간 "이 사람에게 이런 점도 있구나"하는 생각이 언뜻 들었다.
실질적인 단독 회견은 포항에서 서울로 올라오는 기차 안에서 이뤄졌다. 앞으로의 정치 일정과 선거 예정일 등 알토란 같은 특종을 얻어낼 수 있었다. 나는 마감시간 때문에 대구역에서 먼저 내려 북성로에 있던 동아일보 지사로 달려갔다. 그날 동아일보 석간 1면은 '박 의장 단독회견'으로 채워졌다. 난 그 덕에 특종 상금을 탔으며 그 상금으로 정치부 저녁 회식까지 했다.
울릉도까지 쫓아가 단독 회견을 한 인연 때문인지 그 후 박 의장은 가끔 비공식적으로 나를 찾았다. 만나면 만날수록 박 의장에 대한 내 생각은 조금씩 변해갔다. 그에게서 인간적인 면을 문득문득 느낄 수 있었고, 민족의식과 자립경제 의지에 매력을 느끼며 그에게 빠져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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