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나의 이력서]이만섭(24)기자시절⑨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나의 이력서]이만섭(24)기자시절⑨

입력
2002.08.24 00:00
0 0

2개월의 형무소 생활을 끝내고 신문사로 돌아온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주일 특파원 발령이 났다. 필화 사건으로 고생한 데 대한 신문사의 배려 차원이었다.내가 일본으로 특파될 당시에는 상주 특파원 제도가 없었지만 한일 회담에 대비해 주요 신문사에서 일본에 특파원이 나와 있었다. 당시 한국일보에서는 임삼(林森ㆍ대한축구협회 고문), 조선일보에서는 김윤환(金潤煥ㆍ전 국회의원), 동양통신에서는 한종우(韓鍾愚) 기자가 부임해 있었다.

나는 특파원 생활을 시야를 넓힐 수 있는 좋은 기회로 삼기로 하고, 바쁘게 살아갔다. 머리 속에는 일본을 철저하게 배워야겠다는 생각이 가득했다. 매일 일본의 주요 신문들을 샅샅이 읽었으며, 교포사회 취재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당시 일본은 한국전쟁 특수를 톡톡히 누리며 경제적으로 다시 일어서기 시작했다. 우리나라의 상황을 떠올리면 한편으로는 부럽고, 또 한편으로는 안타깝기도 했다.

부임한 지 2개월여가 지난 1961년 11월, 박정희(朴正熙)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일본을 방문했다. 실질적인 국가 수반이 된 이후 첫 일본 방문이었다. 일본은 한국의 젊은 군사 혁명가에게 큰 관심을 보였다. 이케다 하야토(池田勇人) 총리가 직접 공항에 나가 영접했다.

박 의장은 11월12일 이케다 총리와의 정상회담, 기시 노부스케(岸信介) 전 총리와의 오찬, 재일동포 면담 등 눈 코 뜰새 없는 바쁜 스케줄을 보냈다. 그날 저녁 박 의장은 숙소인 영빈관에서 130여명의 내ㆍ외신 기자가 참석한 가운데 기자회견을 가졌다. 나와의 첫 대면이었다.

나는 불과 몇 달 전 육군 형무소에서 억울한 옥살이를 한 기억이 났지만 그래도 일본에서 한국의 국가 원수를 도와야겠다는 생각이 앞섰다. 나는 기자회견이 열리면 맨 먼저 질문을 하기로 마음 먹었다. 외신기자가 대부분인 기자회견장에서 한국기자가 먼저 질문을 해야 박 의장이 용기를 얻을 수 있고, 또 답변을 통해 우리나라 입장을 밝힐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나는 질문권을 제일 먼저 얻어 다음과 같이 물었다. “첫째, 대일 청구권에 관해 이케다 총리가 구체적인 숫자를 제시했습니까? 둘째, 한국은 대일 청구권과 한국에 대한 일본의 경제 협력 문제를 분리해 왔는데 그 방침은 변함이 없습니까? 셋째, 이번 같은 회담이 장래에 또 있을 예정입니까?”

박 의장 방일을 정리하는 기본적인 질문이고, 또 외신기자들의 궁금증을 박 의장이 자연스럽게 해소하도록 하는 질문이라고 여겼는데 박 의장의 반응은 뜻 밖이었다. 박 의장은 퉁명스럽게 짤막하게 답변했다. “대일 청구권 문제는 실무자 회의에서 진전이 없어 정상회담에서는 구체적인 토의가 없었습니다. 둘째 질문에 대해서는 변함이 없고, 셋째 질문에 대해서도 현 단계에서는 말 할 수 없습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당시 박 의장은 언론에 대해서 그리 좋지 않는 선입견을 갖고 있었고, 나에 대해서도 유감이 있었다고 한다. 박 의장은 기자회견이 끝난 뒤 정일영(鄭一永) 당시 한일회담 대표에게 “동아일보 그 친구, 국내에서도 애를 먹이더니 여기와서도 속을 썩이는구만”하며 불평을 하더란 것이다.

나름대로 큰 포부를 갖고 시작한 주일 특파원 생활은 그러나 3개월 밖에 지속되지 않았다. 12월 초 김성열(金聖悅) 정치부장에게서 전화가 왔다. 국가재건최고회의 안에 기자실이 생겨 출입기자가 필요한 데 나 말고는 마땅한 사람이 없다고 했다. 김 부장은 하루 빨리 짐을 꾸리라고 말했다.

나는 특파원 생활을 더 하고 싶었다. 그래서 “그 쪽은 쳐다보기도 싫으니 다른 사람을 보내면 좋겠다”고 완곡하게 거부 의사를 밝혔다. 그러나 최고회의 내부 규정이 ‘병역을 마친 사람’으로 돼 있어 적임자가 없다며 거듭 귀국을 종용했다.

하는 수 없이 나는 다시 짐을 싸 서울로 돌아왔고, 곧바로 최고회의에 출입하기 시작했다. 최고회의는 당시 가장 중요한 출입처였다. 때문에 몇몇 언론사에서는 복수 출입을 시켰다. 나도 처음에는 혼자 출입했지만, 동아일보는 얼마 지나지 않아 중학교 후배이기도 한 유혁인(柳赫仁ㆍ전 문공부장관) 기자를 보내 나를 돕게 했다.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