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 초 출범한 박항서 축구대표팀 감독체제를 둘러싼 이런 저런 얘기를 듣다 보면 답답한 마음을 감출 수 없다. 우선 어느 조직의 지도자에게나 가장 중요한 조건 중 하나인 임기조차 제멋대로 인 것 같다.축구협회는 당초 박 감독이 부산아시안게임은 물론 2004년 아테나올림픽 때까지 지휘봉을 잡게 될 것이라고 발표했다.
그런데 지금에 와서는 박 감독이 아시안게임만 맡게 된다는 설이 그럴듯한 명분과 논리로 포장된 채 기정사실처럼 굳어지고 있다.
축구대표팀 감독이 마치 임시직처럼 추락한 데는 박 감독 자신이 엄청난 부담을 느끼고 있기 때문이라는 게 가장 큰 이유라고 한다.
감독 경험이 없는데다 월드컵 4강 신화의 뒤끝이라 “한국축구의 위상을 떨어뜨리면 안 된다”는 강박관념이 그를 억누르고 있다는 얘기다.
그러나 박 감독 선임 며칠 뒤 축구협회 안팎에서는 “박항서 감독으로는 불충분하다”는 말이 떠돌았고 거스 히딩크 감독 재영입설이 나오는 등 그에게 정신적 압박을 가한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
감독의 명칭과 역할도 애매하다. 축구협회는 박 감독이 23세 이하가 주축인 아시안게임ㆍ올림픽대표팀 감독일 뿐이며 A매치 때는 다른 감독을 선임한다고 밝혔다.
하지만 일부 기술위원들은 사견을 전제로 박 감독이 겸임해도 별 문제가 없다고 말한다. 또 연봉 등 기본조건도 아직 해결되지 않았다. 국가대표팀 감독에겐 돈보다 명예가 소중할 수 있지만 전임자와 비교해 터무니 없이 적다면 사기에 영향을 미치지 않을 수 없다.
히딩크 감독이 “월드컵이 끝난 뒤에도 축구는 계속된다”고 말한 것처럼 이젠 4강 신화에서 벗어나 미래를 설계해야 한다. 한일월드컵 직후 브라질 출신의 지코를 대표팀 감독으로 선임한 뒤 일찌감치 2006년 독일월드컵에 대비하고 있는 일본에 비하면 늦어도 한참 늦은 셈이다.
박항서 감독에게 힘을 실어주자. 자기의 작품을 완성하기 위한 밑그림을 착실히 그려나갈 수 있도록 신뢰를 보여주자. “월드컵 4강에 오른 나라인데 아시안게임은 아무것도 아니겠지”라는 안이한 태도로 일관한다면 축구강국의 환상은 월드컵 폐막 넉 달도 안돼 허물어질 수 있다.
허정무 전 대표팀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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