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사원의 공적자금 특별감사 결과 발표가 있은 지 2~3개월 뒤인 올 초, 공적자금 투입 은행의 전ㆍ현직 은행장 10여명이 시내 한 호텔에서 회동을 가졌다. 소송을 당할 위기에 몰린 전직 은행장들이 소송의 주체가 될 현직 은행장들에게 ‘읍소’를 하기위한 자리였다.“정말 난감한 자리였습니다. 누구를 막론하고 모두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지만 한 쪽이 다른 한 쪽을 대상으로 어쩔 수 없이 소송을 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니까요.” 한 현직 시중은행장은 이렇게 회고했다.
그로부터 6개월여가 지난 지금. 예금보험공사는 공적자금이 투입된 제일은행 등 6개 은행에 공적자금 투입을 초래했다고 판단되는 귀책심사대상자 80여명의 명단을 통보,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하도록 요구했다.
명단에는 당시 회동에 참석했던 전직 은행장의 이름이 대부분 포함됐다. ‘어제의 동료가 오늘의 적’으로 바뀌는 우려했던 상황이 드디어 시작된 셈이다.
“비참한 심정입니다. 나름대로 은행을 위해 성실히, 그리고 열심히 일했다고 자부해왔는데 이제는 죄인으로 전락해 버렸습니다.” 은행장 재직 당시 취급했던 기업 여신 부실화로 금융감독원에서 ‘문책 경고’를 받은 뒤 예보 명단에까지 올라 소송에 휘말리게 된 전직 은행장 A씨는 요즘 수면제가 없으면 잠을 청할 수 없다.
올 초부터 은행의 후배 임직원들을 찾아 다니며 억울함을 하소연해도 보고 조심스럽게 예보의 동향을 살피는 등 발버둥을 쳤지만 허사였다. 집과 부동산은 친인척 명의로 이전한 뒤였지만 최근 은행측이 골프 회원권, 은행 주식, 자동차 등 나머지 재산에 대해 가압류를 해오면서 상실감은 더욱 커졌다.
“소송에서 질 가능성은 거의 없다”는 것이 변호사의 답변. 다소 나마 안도는 했지만 문제는 가족들이었다. 아내는 오래 전부터 신경 쇠약 증세를 보이며 잠을 설치기 일쑤였고, 자식들과의 대화는 사실상 끊긴 지가 오래다. “그래도 업무를 아는 동료들은 충분히 이해를 해주지만 가족들은 그렇지 못한 것 같다. 자랑스럽게만 여겼던 남편, 아버지가 사회적인 죄인으로 전락했다는 사실에 무척 혼란스러워 하고 있어 그저 죄스러울 따름이다.” 그는 고개를 떨궜다.
죽음도 이들에게 면죄부를 주지는 않는다. 창업 2세인 전 제주은행장 김성인씨는 1998년말부터 우울증이 극도로 악화한 끝에 올 4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고려무역 등에 대한 부당여신 취급건으로 15억원의 손해배상 청구소송이 진행중이던 때였다.
유서 한 장 남긴 것은 없었다. 하지만 은행 직원들은 “소송에 휘말려 상속 재산까지 모두 날릴 위기가 아니었다면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선택을 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수개월 전, 그는 “안타깝고 억울한 마음을 지울 수 없다”는 내용의 탄원서를 곳곳에 제출했다. 그의 죽음 뒤에도 은행측이 제기한 소송은 유족들을 상대로 계속 진행중이다.
이들에게 비춰진 현재의 상황은 ‘마녀 사냥’ 그 자체다. 지방은행에서 여신 담당 임원을 지낸 B씨는 열변을 토한다. “최근에서야 정착된, 당시에는 개념조차도 없었던 건전성 기준을 무차별적으로 들이 대고 있습니다.
경영적 판단에 따른 것임은 물론이고 당시 금융 당국도 정상 대출로 판정을 해놓은 사안을 두고 이제 와서 위법이라고 몰아세우다니…. 물론 결과적으로 공적자금 투입을 야기한 마당에 도덕적 책임까지 외면하자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더라도 기업들 부도를 막기 위해 은행들의 지원을 독려, 아니 사실상 강압했던 정부가 그 책임을 모조리 은행원과 기업에게만 떠넘기려는 현실에 정말 배신감을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떠난 이들의 아픔은 남아있는 이들에게도 무거운 짐을 지우고 있다. 국제통화기금(IMF) 체제를 이들과 함께 겪은 시중은행 한 고위 관계자는 “이들의 고통을 전적으로 공감하지만 아무 것도 손을 쓸 수 없는 현실이 안타까울 뿐”이라며 “ 40년 가까이 은행을 위해 일해 온 내 자신이 한스러울 때가 한 두 번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몇 번씩이나 발걸음을 한 선배, 동료, 후배를 그렇게 돌려보낸 그는 이제는 그들에게 소송의 굴레를 씌울 준비를 하고 있다. “단 1%라도 문제가 생길 소지가 있는 대출 건에 대해서는 아예 취급할 생각조차 하지 않는 보신주의에 만연된 젊은 행원들에게 지금 누가 시시비비를 따질 수 있겠는가”라는 그의 되물음에 진한 허탈감이 묻어났다.
이영태기자
ytlee@hk.co.kr
■손배訴로 회수가능 금액은
예보가 추진하는 손배소에 대해 금융계에서는 실효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의견이 많다. 무차별적인 소송에도 불구하고 실제 공적자금 환수효과는 거의 없을 것이라는 지적이다.
예보는 이에 대해 “1999년 6월부터 진행 중인 파산 금융기관 임직원에 대한 손해배상청구소송 결과 1심이라도 판결이 난 소송의 경우 승소율은 72%에 달했다”고 밝혔다.
지금까지 309개 파산 금융기관 직원 2,567명을 대상으로 1조2,280억원의 손배소를 제기했으며, 이 중 1심 판결이 난 163개 금융기관 임직원 943명에 대한 3,300억원 손배소에서 2,400억원에 달하는 금액에 대해 승소했다는 것이다.
물론 1심 결과여서 최종 승소 금액이라 보기는 힘들며, 회수가능 금액이라 기대하기는 더더욱 어렵다. 특히 퇴출 금융기관의 경우 횡령 등 불법행위가 잦았던 금고, 신협, 종금사 등이 대부분을 차지했지만, 앞으로 진행될 소송은 은행이나 회계법인, 기업 등에 집중돼 있어 승소 확률이 크게 떨어질 것이라는 분석도 나오고 있다.
그러나 예보 조사1부 이형구 팀장은 “정관이나 법령 위반 사항이 없을 경우 또는 정책차원에서 결정된 여신에 대해서는 소송을 하지 않는 등 신중을 기하고 있다”며 “따라서 승소율이 매우 낮을 것이라는 지적은 터무니 없다”고 말했다.
예보는 소송 대상자의 현재 재산이 없을 경우 앞으로 재산이 생길 수 있다는 전제 아래 대표이사는 7억원, 임원은 5억원, 직원과 감사는 3억원을 소송금액으로 정해놓은 상태다.
재산이 있는 경우엔 받아낼 수 있는 재산규모에 대표이사는 7억원을 더하고, 임원과 직원은 각각 5억원, 3억원을 더한 액수가 소송금액이 된다. 즉, 재산이 8억원 있는 전 은행장은 여기에 7억원을 더한 15억원의 배상소송을 당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원고가 승소한다고 해도 승소 금액을 전부 회수할 가능성은 높지 않다.
남대희기자
dhnam@hk.co.kr
■예보 "법대로 할 뿐이다"
“부실을 초래한 금융기관 및 기업체, 회계법인 임직원에게 손해배상청구소송을 통해 책임을 묻는 것은 예금자보호법에 따른 것으로 재발방지를 위해 불가피하다.”
예금보험공사가 손배소를 본격화하면서 부실책임 도마에 오른 금융계와 업계, 회계법인 임직원들이 크게 반발하고 있으나 예보의 입장은 단호하다. 공적자금 투입의 주체로서, 그리고 사후관리자로서 부실을 야기한 자에게 책임을 추궁하는 것은 예보의 권한과 의무라는 말이다.
환란 후 예보는 1999년 6월부터 3년간 퇴출된 309개 금융기관 임직원 2,567명을 대상으로 1조2,280억원의 손배소를 제기했으며, 4,411건(1조1,820억원)의 재산을 가압류한 상태이다.
은행 6개(5개 퇴출은행+제주은행)와 증권 3개, 보험 14개, 종금사 21개, 신용금고(현 저축은행) 80개, 신협 185개 등 퇴출 금융기관 임직원을 상대로 해당 기관 파산재단이 소송을 제기토록 한 것. 아직까지 대부분 소송이 진행 중이다.
예보는 퇴출 금융기관에 대한 책임 추궁에 이어 작년말부터는 분식회계 및 계열사 부당지원 등으로 부실을 야기한 기업주 및 임직원, 회계법인 및 회계사, 공적자금을 투입받아 정상 영업 중인 금융기관 등으로 조사 대상을 확대하고 있다.
우선 제일ㆍ우리ㆍ서울ㆍ조흥ㆍ평화ㆍ경남 등 6개 은행 전직 행장 10여명을 포함한 100여명의 임직원을 대상으로 1조원 정도의 부실책임을 묻기 위한 소송을 내도록 해당 금융기관에 요청한 상태다. 농협ㆍ수협ㆍ한국투신등에 대해서도 조사 중이다.
부실기업의 경우는 총 1조1,699억원의 부실 책임이 있는 고합, SKM, 보성인터내셔널 등 3개사 임직원 66명을 상대로 손배소가 제기됐거나 준비 단계에 있다. 예보는 이들 3개사 이외에 대우, 진도, 대농, 극동건설, 나산 등의 부실기업 임직원에 대해서도 심의가 끝나는 대로 소송절차에 들어갈 계획이다.
이밖에도 고합의 분식회계에 대한 감사를 소홀히 해 회사에 손실을 끼친 연대책임을 물어 회계법인 한 곳과 소속 회계사 4명에 대해 78억원 규모의 소송을 준비중이다.
예보 관계자는 “소송 당하는 사람들은 억울함을 호소하지만, 명백한 위법이나 위규행위가 있는 경우에만 소송을 하고 있다”며 “예보가 공적자금 회수부진의 책임을 면하기 위해 막무가내로 소송을 남발한다는 지적은 전혀 맞지 않는다”고 말했다.
남대희기자
dhna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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