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행은 일종의 변증법이다. 장식을 최대한 배제한 미니멀리즘이 세련미의 척도로 한창 인기를 구가하면 그 반동으로 화려한 러플과 주름, 자수로 장식된 로맨틱 스타일이 뒤를 따른다. 청순한 느낌의 긴 생머리가 한창 유행하고 난뒤에는 너나없이 나풀거리는 짧은 퍼머머리가 생기발랄한 여성미의 대명사처럼 시선을 사로잡는다.
유행의 변증법에는 쉽게 싫증내고 늘 새로운 것을 추구하는 인간의 본성이 깔려있다. 사회학자들은 인터넷을 통해 정보의 유통속도가 빨라질수록 유행의 순환속도도 빨라진다고 말한다.
지난 봄과 여름 맹위를 떨쳤던 로맨티시즘이 가을에는 패미큘린(FamiCuline)이라는 새로운 트렌드에게 권좌를 내놓아야할 모양이다. 패미큘린은 패미닌(Famineneㆍ여성적인)과 매스큘린(Masculineㆍ남성적인)을 합친 신조어. 밝고 화사한 로맨틱 스타일에 대한 반동으로 훨씬 어둡고 바랜듯한 색상에 남성적인 것과 여성적인 것이 절묘하게 믹스된 형태의 스타일을 보여주는 새로운 모드를 일컫는다.
삼성패션연구소 패션기획팀 서정미 팀장은 “의류소비가 나이나 성별보다는 마인드 중심으로 이루어지면서 패션 착장법에 있어서도 ‘경계 허물기’가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 드라마 ‘순수의 시대’에서 동화(박정철 분)가 입고 나오는 여성스러운 연두색의 러플 달린 셔츠가 그 한 예다. 남성용, 여성용이라는 구분이 무의미한, 양면적인 이미지를 동시에 갖추는 것이 트렌드로 제시되면서 지나치게 여성성을 내세웠던 로맨티시즘에 대한 반동으로 패미큘린이 새롭게 부각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밖에도 지난해 뉴욕테러에 이은 전세계적인 테러공포와 경제불황에 대한 소비자들의 불안심리가 복합적이고 강한 이미지를 드러내고자 하는 욕구를 자극시킨 것이 패미큘린의 부상 요인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패미큘린 룩은 올해 초 세계적인 컬렉션들에서 이미 단초를 내보인 바 있다. ‘조르지오 아르마니’의 여성들은 각이 지고 풍성해진 신사복 스타일의 재킷을 당당하게 선보였으며 ‘알레산드로 델라쿠아’는 한술 더 떠서 남성용 검정색 스트라이프 수트에 섹시한 녹색 시폰 블라우스를 믹스시켜 도발적인 여성미를 강조하고 턱시도를 새롭게 해석한 작품들을 선보였다. 또 ‘구치’와 ‘랄프 로렌’ ‘발리’ 등의 브랜드도 이브닝코트와 고딕스타일의 각 진 재킷, 남성용 모자 페도라를 곁들인 세련된 스타일들을 제시했다.
국내서는 ‘베스띠벨리’ ‘Si’ ‘X’ ‘조앤루이스’ 등 내셔널브랜드들을 중심으로 패미큘린 스타일들이 대거 선보이고 있다. ‘베스띠벨리’ 디자인실 남명숙 실장은 “딱딱한 직선 느낌으로 재단된 재킷 아래에 레이스로 장식된 블라우스와 티어드스커트를 매치시키는 식으로 감각적인 연출을 하는 것이 패미큘린 룩을 제대로 소화하는 법”이라고 말한다.
대표적인 아이템으로는 매니시한 핀스트라이프 수트와 전형적인 남성복 아이템으로 여겨지는 정장 스타일의 베스트, 턱시도 재킷, 박스형의 미니멀한 반코트, 카프라를 넓게 잡은 통바지, 그리고 육감적인 블랙색상의 단품류가 있다.
‘X’ 디자인팀 손안나 팀장은 “특히 벨벳이나 실크를 덧댄 정장풍의 베스트 아이템들이 예년에 비해 두 배 이상 눈에 띈다”며 “정장과 베스트를 스리피스 풀세트 개념으로 구입하는 사람들도 많아졌다”고 말한다.
이성희기자 summer@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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