엊그제 북한 주민 3가족 21명을 태운 탈북 어선이 서해를 거쳐 귀순했다. 48시간의 죽음의 항해 끝에 인천에 도착한 이들은 ‘식량난으로 인한 생계의 어려움’을 탈북의 이유로 들었다. 북한 주민의 탈북이 새삼스런 일은 아니다. 중국으로 건너가 외교공관을 이용해 망명을 요청하거나, 몽골이나 동남아국가를 통해 한국으로 오는 경우도 드물지 않았다.그런데도 이번 탈북이 관심을 끄는 것은 북한의 경제개혁조치가 단행된 7월 이후 첫 대규모 귀순인데다, 배를 타고 서해바다로 탈출하는 북한판 ‘보트피플’ 의 등장이라는 점 때문이다. 해상 감시 체제가 철저하고 선박의 입출항 통제가 엄격한 북한에서 대규모 탈출이 이루어졌다는 것은 앞으로 유사한 해상 엑소더스가 줄 이을 것임을 예고하고 있다.
정부가 남북관계에 미칠 영향을 고려해 이번 사건을 단순 일회성 탈북 사건으로 평가절하하고 있지만, 탈북 행렬이 줄어들 조짐은 어디에도 없다. 북한의 새로운 경제정책이 물자부족 등 경제난을 극복할 수 있을 지 극히 불투명하기 때문이다.
북한은 지금 엄청난 경제 실험을 하고 있다. 물가와 가격을 현실화했고 토지사용료를 징수하기 시작했다. 기업 운영면에서도 실질적인 독립채산제를 도입했다.
성과가 좋으면 인센티브를 주겠다는 얘기다. 북한 당국의 의도대로라면 농산물 수매가격 인상은 농민의 의욕을 불러 일으켜 증산 효과를 가져 온다. 그래서 식량 사정이 개선되면 전반적인 경제활동이 촉진돼 성장 동력을 확보할 수 있다는 것이 북한 당국의 계산이다.
과거 사회주의 개혁의 대표적인 사례인 헝가리나 중국의 경우에도 농산물 수매가격의 인상은 전반적인 경제개혁의 출발점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북한의 소유제와 경제개혁 매커니즘의 기본틀이 여전히 사회주의적 성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1978년 중국의 개혁에서는 농민들에게 토지와 자재를 임대해 주는 ‘농가청부제’가 이루어져 인구의 70% 를 차지하는 농민계층이 사실상 자영 농가로 전환했다. 도시에서는 개인 자영업 창업이 봇물을 이뤘고, 비국유 기업도 나타나 기업간 경쟁도 치열해졌다. 북한이 개인 영농을 시범 도입했다고는 하지만 중국식 개혁에는 한참 뒤떨어진 수준이다.
북한 경제 전문가들은 북한이 전혀 경험해 보지 못한 새로운 시도를 하고 있어 많은 부작용이 나타날 것으로 분석하고 있다. KOTRA는 '북한의 임금 및 물가인상 조치에 대한 평가와 향후 전망' 보고서에서 북한이 임금ㆍ가격 인상 등에 따른 통화 증가량을 소화하지 못하면 최악의 인플레이션이 염려된다고 전망했다.
물가와 임금이 종전 보다 몇 십 배 오른 상태에서 쌀을 포함한 물자를 적기에 공급하지 못하면 살인적인 인플레이션이 올 것은 뻔하다. 북한은 ㎏당 8전에 배급하던 쌀값을 무려 550배나 올려 44원에 판매하고 있다. 그러나 월 110원을 주던 생산 노동자 임금은 2,000원으로 18배밖에 올리지 않았다. 북한의 의도대로 가격을 현실화해 암시장 물가가 잡힌다면 다행이지만, 그렇지 않으면 노동자들은 가격과 임금격차로 더 어려운 생활을 할 수 밖에 없다.
최근 북일 적십자 회담 취재차 평양을 다녀온 일본 언론들은 식품류는 40~50배 올랐고, 10전이던 지하철ㆍ버스요금은 1원으로 10배나 뛰었다고 전하고 있다. 달러 당 2.15원 이던 환율은 150원으로 70배가 됐다고 한다.
사회주의 국가 중 개혁에 성공해 경제성장을 계속하고 있는 나라는 중국과 베트남 밖에 없다. 구 소련 출신 국가나 동유럽의 사회주의 국가의 경제 개혁은 참담한 실패로 끝났다. 북한이 시장경제로 나가는 문을 열었지만 첫 걸음에 불과하다. 개혁의 실패는 곧 북한 주민들의 탈북 러시로 이어질 수도 있다. 우리가 북한의 경제개혁이 궤도에 오르도록 도와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우선 북한이 식량문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지원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 북한의 경제개혁 실패와 보트피플은 우리에게는 이음동의어(異音同意語)이기 때문이다.
이창민 논설위원
cm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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