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악의 핵’파문으로 표면화한 사우디아라비아와 미국의 갈등이 9ㆍ11 테러와 관련한 맞소송 대결로 비화하는 등 갈수록 심각한 양상을 띠고 있다.사우디 정부가 미국의 이라크 공격에 반대하는 의사를 분명히 한 뒤로는 사우디의 반미 여론과 이에 맞서는 미 정부내의 반 사우디 분위기가 전통적인 양국 동맹관계를 회복 불가능의 수준으로 높이고 있다.
9ㆍ11 테러 직후 미국에서 강제출국당한 유학생 등 사우디 민간인 수십 명은 곧 미국 정부와 언론 등을 상대로 손해배상을 청구하는 소송을 제기할 계획인 것으로 21일 알려졌다.
이는 미국 변호사들이 9ㆍ11 테러를 일으킨 알 카에다와 오사마 빈 라덴에게 자금을 제공했다는 이유로 사우디 왕가와 은행, 자선 단체들을 상대로 집단 손해배상을 청구하는 소송 절차를 개시한 지 1주일도 안 돼 나온 것이다.
이 소송을 준비 중인 사우디의 카티브 알-샴리 변호사는 “미국에 의해 알 카에다와 관련이 있다고 잘못 지목된 사람들을 대신해 소송을 제기할 것”이라면서 현재 15건의 소송을 준비하고 있다고 밝혔다.
소송 의뢰인들 중에는 아무 혐의도 없이 미국 당국에 의해 억류돼 학업을 중단한 학생과, 미국 언론에 알 카에다 혐의자로 이름과 사진이 잘못 공표된 이들이 포함돼 있는 것을 알려졌다.
사우디의 반미 분위기는 올해 1ㆍ4분기 미국의 대 사우디 수출이 40%나 감소한 데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미국이 팔레스타인의 목소리를 외면하고 이스라엘을 지지하는 데 대한 반발로 확산된 미국 상품 불매운동의 결과이다.
친정부 성향의 사우디 일간 알-리야드는 16일 미국과의 전략적인 동맹관계를 수정할 것을 주장하는 사설을 1면에 게재했다. 이 신문은 “미국이 유일한 전략적 선택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이의를 제기해야 한다”면서 사우디를 ‘악의 핵’으로 규정한 미 싱크 탱크 랜드연구소의 주장을 비난했다. 사우디의 지식인들 사이에서는 미국의 내정간섭에 반대하는 서명운동이 벌어지고 있다.
이에 맞서 미국의 사우디 비판도 계속되고 있다. 워싱턴 근동정책연구소의 한 연구원은 1일 상원의 한 소위원회에서 “사우디 당국이 9ㆍ11 테러범들에게 자금 지원을 한 혐의를 받고 있는 자선 단체들을 본격적으로 단속하고 있지 않다”면서 “이는 사우디 왕가의 개입이 드러나는 것을 우려하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워싱턴 포스트는 21일 미 정부가 중동국가의 경제, 정치적 개혁을 증진하기 위한 프로그램을 이르면 내달 초부터 가동하기 시작할 것이라고 전하고 이들 국가에는 사우디와 이집트 등이 포함돼 있다고 보도했다.
이 신문은 “9ㆍ11 테러의 범인 19명 가운데 15명이 사우디인이라는 점은 중동지역의 가난과 전제통치가 미국의 위협이 되고 있다는 점을 시사하는 것”이라며 “이 프로그램은 정치 활동가와 언론인 등에게 자금을 제공하는 것을 포함하고 있다”고 전했다.
남경욱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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