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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을 열며] 승강기 안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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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을 열며] 승강기 안에서

입력
2002.08.2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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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저녁으로 승강기를 타고 아파트 16층을 오르내린다. 오르내리다 보면 만나는 사람이 있고 만나다 보면 거듭 만나는 사람이 있다. 그래서 결국 몇몇은 얼굴을 알아볼 정도가 된다. 그 정도가 되면 이제 아는 체를 해야 할 지 서로 신경을 쓰게 된다.그런데 좀처럼 먼저 아는 체를 잘 하지 못한다. 두어 번은 오히려 시선을 마주치지 않으려고 괜히 시계를 보거나 문 위 전광번호판에 눈길을 주기도 한다. 그러다가 결국 누군가가 먼저 아는 체를 하게 되는데 그 다음부터는 계속 인사를 주고받아야 하는 의무감을 느끼게 된다. 그것도 저으기 신경이 쓰이는 일이다.

문제는 아는 체를 하느냐 않느냐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런 문제로 신경을 쓰는 그 짧은 순간에 이 한 평 미만의 좁은 공간을 함께하고 있는 우리에게 어떤 삶의 내용이 공유되고 있느냐 하는 것이다. 따지고 보면 승강기 안에서 가끔 만난다는 것 뿐, 그와 나 사이에는 아무런 직접적인 관계도 없다.

아무런 직접적 관계도 없는 우리는 서로에게 무엇인가. ‘무(無)’인가? 언젠가 사르트르는 그런 식으로 말한 적이 있는 것 같다. 관심의 대상이 전혀 아니라면 실제 ‘무’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생각하면 ‘무’일 수 없다는 것이 문제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우리와 구체적인 관계에 있는 사람들만으로 구성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세상에 대한 관심에는 이미 수많은 모르는 사람들에 대한 관심이 포함되어 있다. 의식을 하든 않든 우리의 깊은 자의식 속에 녹아 있는 이 관심은 사실 온갖 구체적 관심들보다 더 중요하고 더 본질적인 것이다.

누군가가 나의 ‘동료’라는 사실은 그가 같은 ‘인간’이라는 사실에 비하면 실은 사소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번쇄한 세상살이는 흔히 그 우선 순위를 뒤바꾼다. 급격한 경제개발 과정에서 우리의 구체적 관심이 온통 모리(謀利)에 치중해 온 것도 그런 사정을 더 악화시켰을 것이다.

오래 전 미국의 어느 시골에 있는 큰 슈퍼마켓에 들렀을 때였다. 한적한 식품 코너를 지나고 있었는데 젊은 아낙 하나가 내 옆을 지나며 무어라 짤막한 인사를 건넸다. 나는 주위의 어떤 다른 사람에게 그러는 것인가 하고 주위를 둘러 보았으나 주변에는 그녀와 나 이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녀가 나에게 인사했다는 것을 알고 비로소 그녀 쪽으로 다시 얼굴을 돌렸을 때 그녀는 이미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묘한 웃음 속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저만큼 지나가고 있었다.

세월이 오래 흘렀어도 나는 그녀가 이 낯빛 누런 이방인에게 자연스럽게 인사를 건넬 수 있었던 마음의 기초에 접근하지 못하고 있다.

그 우울한 사건은 오늘도 좁은 승강기 안, 우리의 부자연스런 인사에서 고스란히 반복되고 있다. 나의 일상적 감수성은 동료라든가 가족이라든가 선배라든가 고객이라든가 아무튼 무슨 이해관계로 얽힌 사이가 아니면 무엇을 느끼지도, 기대하지도 못할 정도로 철저히 불모화 된 것은 아닐까.

이해관계가 없다는 사실만으로 서로를 무시하고, 이해관계가 맞지 않는다는 사실만으로 기본도 없이 적개심을 드러내는 이 막막한 현실은 좁은 승강기 안이라고 해서 예외를 만들지 않고 있다.

무언가 치명적인 것이 우리 속에 깊숙이 들어와 우리의 삶을 휘젓고 있는데 나의 공부는 아직도 그것을 시야에 담아내지 못하고 있다. 설혹 내가 남은 생애를 더 각고하여 나 자신을 부단히 연마한다 하더라도 그 결과는 여전히 추상적인 차원을 넘어서지 못할 것 같다. 미국의 시골 아낙이 가지고 있던 무심한 마음의 기초에 이르기까지 내가 건너야 할 강은 이렇게 깊고 넓기만 하다.

이수태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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