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프리 골드파브 미국 뉴 스쿨 유니버시티 사회학과 교수 아시아의 한 인권운동가가 내 수업 시간에 자기가 국가안보에 위협이 된다고 자랑스레 소개했다. 민주적 가치를 추구한 행동 때문에 그녀가 은밀히 여행했던 동남아시아 2개 국의 정부와 불화를 빚게 됐다는 것이다.이달 초 폴란드 크라코프에서 민주주의 문화에 관한 우리의 세미나가 끝나갈 무렵, 그녀는 “그동안 너무 단순화된 주장이라고 치부해 왔는데, 이제 나는 미국의 민주주의가 세계 다른 지역에서 민주주의의 억압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확신하게 됐다”고 선언했다. 더욱 심각한 것은 이런 얘기가 학생들의 중론이라는 점이었다.
매년 1일 나는 민주주의와 다양성에 관한 강좌를 위해 남아프리카공화국 케이프타운으로 간다. 7월에는 비슷한 강좌를 위해 크라코프를 찾는다. 대학원생, 교수, 인권운동가, 젊은 공공정책 고문들이 이 자리에 모인다.
지난 1월 아프리카에서, 그리고 불과 몇 주 전 중부 유럽에서 세계 곳곳에서 모인 젊은 오피니언 리더들을 통해 내가 보게 된 것은 충격적이었다. 반미는 이제 단순히 정치의 언저리에서나 인기를 끄는 신경질적인 판단이 아니다. 그것은 진정한 민주주의자들에게 하나의 원칙이 되었고, 불행하게도 테러리즘에 대한 전쟁이 문제가 되면서 더더욱 반향을 얻고 있는 것이다.
나는 강의실에서 9ㆍ11 테러에 관한 논의를 하면서 충격을 받았다. 젊은 나이지리아 교수 한 사람을 제외하고 남부 아프리카 출신 학생 모두가 테러조직 알 카에다와 싸우는 문제가 아니라 테러리즘에 대한 미국의 전쟁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참가자들은 미국인이 희생자라는 사실은 상상할 수 없는 듯 했다. 그들은 오직 미국의 힘만을 알고 있었고 우리의 과다한 힘의 행사를 비난했다.
나는 미군의 아프카니스탄 전쟁을 기본적으로 해방으로 이해한 반면 남아공의 교사와 학생들은 그것을 초강대국의 위협으로 보았다. 또 내가 자폭테러를 통해 나의 절친한 친구를 포함해 수천의 무고한 시민을 죽인 자들의 정신구조를 파악하려 했다면 그들은 테러리즘과의 전쟁에서 발생한 부수적 피해의 끔찍함만을 강조하려 했다.
9ㆍ11 이전, 유럽에서 반미는 온건한 사안이었고 프랑스와 미국간의 애증관계의 핵심적인 부분일 뿐이었다. 그러나 9ㆍ11 이후, 그리고 대테러전이 확대되면서 그것의 양상은 더할 나위 없이 심각해졌다.
한 학생이 왜 테러 자체가 아니라 테러에 대한 반응에 초점을 모아야 하는가를 설명했다. 독재자들이 대테러전을 민주주의를 옹호하는 사람들에 대한 탄압을 정당화하는 구실로 이용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제 필리핀과 인도네시아 이슬람인들의 인권이나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미얀마의 권위주의 체제에 대한 비판자들의 권리는 조지 W 부시 미 행정부에는 중요하지 않게 되었다. 중앙아시아 독재권력의 전략적 자원이 인권운동가들의 목숨보다 더 중요해졌다. 미국적 생활방식과 민주주의의 수호는 미발전국 시민들의 민주적 권리에 대한 무관심에 토대하고 있다는 등등의 얘기였다.
내가 함께 한 학생들을 놓고 볼 때 나로서는 인도네시아에서 온 젊은 이슬람인, 태국에 사는 미얀마 반체제 운동가, 폴란드 우크라이나 슬로바키아 체코 인도네시아의 페미니스트들이 독단주의와 그에 기반한 테러에 맞서 승리를 얻기 위한 열쇠로 보인다.
실제로 그들만이 자기 동포들에게 테러리즘에 대한 대안을 제시할 수 있다. 이는 외부에서 해 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들이야말로 반테러리즘 투쟁의 전선에 있는 것이다. 그들의 입장을 약화시키는 어떠한 전쟁도 자멸에 이르게 될 것이다.
대테러전이 성공하려면 그와 같은 사람들이 우리 편이 되어야 한다. 군사적 위협에는 군사적으로 대처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민주주의를 수호하고 테러리즘을 퇴치하려면 세계의 민주주의자들의 목소리를 경청하고 그에 알맞게 행동하는 것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점을 인식해야만 한다.
/제프리 골드파브 NYT 신디케이트=뉴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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