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ㆍ19 학생혁명으로 자유당 정권은 마침내 종언을 고했다. 4월19일 정부는 서울 부산 대구 대전 광주 등 5개 도시에 비상계엄령을 선포, 군의 힘으로 시위를 막으려 했다. 그러나 군은 더 이상 정권의 편이 아니었다.나는 취재 현장을 누비면서 계엄군과 시민이 한 마음임을 똑똑히 확인할 수 있었다. 시민들은 서울에 진주한 계엄군 탱크 위로 올라가 군인들과 함께 손을 흔들기도 했고 만세를 불렀다.
초조해 진 것은 경무대였다. 23일 이기붕(李起鵬)씨는 ‘부통령 당선 사퇴 고려’ 성명서를 발표했다. 처음에는 ‘당선 사퇴’ 였으나 강경파가 고집을 부려 ‘고려’라는 꼬리표를 붙였던 것이다. 국민들은 자유당의 속임수에 분노해 다시 일어났다.
하루 만인 24일 이기붕씨는 모든 공직에서 사퇴했고 이승만(李承晩) 대통령도 하야를 발표했다. 28일 이기붕씨 일가족이 경무대에서 자살했고 5월29일 이승만 대통령은 하와이 망명길에 올랐다.
허정(許政) 과도내각 아래 7월29일 5대 국회의원 선거가 실시됐다. 민주당의 압승이었다. 그러나 조병옥(趙炳玉) 박사의 서거로 민주당의 구심점이 없었던 탓에 정국은 혼미를 거듭했다. 민주당 신파 장면(張勉) 박사와 구파 김도연(金度演)씨의 총리 경쟁이 과열, 신ㆍ구파 갈등은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깊어졌다.
8월18일 국회에서 선출된 윤보선(尹潽善) 대통령은 같은 구파인 김도연씨를 총리에 지명했으나 임명동의안은 국회 표결에서 111대 112, 한 표차로 부결됐다. 결국 신파의 장면 박사가 총리에 지명됐고 117대 107로 임명동의안이 가결됐다.
새 내각은 적재적소에 인재를 등용하지 못했다. 신ㆍ구파 안배에만 신경을 쓴 탓이다. 정치권이 이러다 보니 사회가 정상적일 리가 없었다. 학생들의 데모는 물론 온갖 데모가 끊이지 않았다. 경찰관들이 국회 앞에서 데모를 하는가 하면 상이군인들이 국회에 난입한 일도 있었다.
민주당 구파는 당내 갈등 끝에 유진산(柳珍山)씨를 중심으로 탈당, 신민당을 창당했다. 정치 경제 사회 어느 한 분야도 제대로 질서가 잡히지 않은 채 나라 전체가 큰 혼돈 속으로 빠져 들었다.
이듬해인 1961년 “바뀌어도 소용없더라”는 말이 나왔고 급기야 ‘4월 군사혁명설’, ‘5월 군사혁명설’이 공공연하게 나돌았다. 신문기자인 내 귀에 이런 소문이 들리지 않을 턱이 없었다.
나는 나라가 걱정됐다. 이대로 가다가는 죽도 밥도 안될 것 같았다. 그때 소장파 의원들이 중심이 된 ‘청조회’(靑潮會)라는 모임이 만들어졌다. 김영삼(金泳三) 박준규(朴浚圭) 백남억(白南檍) 조윤형(趙尹衡) 의원 등이 회원이었다.
그들은 나라일을 함께 근심하며 근검절약을 솔선수범한다는 의미에서 값싼 청색 골덴양복을 입었다. 나는 신문기자로서 이들의 활동을 적극 보도하며 음으로 양으로 이들을 도왔다.
그래도 정국 혼돈은 나아지지 않았다. 기자이기에 앞서 지식인의 한 사람으로서 그대로 두고 볼 수는 없었다. 나는 뜻 있는 각계의 젊은 지식인들을 자주 만나 의기투합했다. 3월1일 이들을 한데 모아 개진회(改進會)라는 모임을 만들어 초대회장을 맡았다.
코리아헤럴드의 김각(金珏) 기자, 중앙일보의 김건진(金建鎭) 이인원(李寅源)기자 등이 언론계 출신이었고 학계에서는 윤형섭(尹亨燮ㆍ전 교육부장관) 김순겸(金淳謙ㆍ전 이화여대교수) 한정일(韓貞一ㆍ전 건국대교수) 등이 참여했다. 개진회는 창립선언문도 만들고 회지까지 발행하는 등 꾸준히 활동을 계속했는데 이 모임은 유신정권 때 공식 해체했다. 그렇지만 회원간의 유대는 길게 이어져 요즘도 가끔 한 데 모여 나라 걱정을 하곤 한다.
이처럼 세상은 어수선했지만 내 나름대로 나라 걱정에 동분서주했다. 바로 그해 5월 16일 새벽, 나는 집으로 걸려 온 전화 한 통을 받자마자 신문사로 달려 나갔다. 대륜중학교 후배라고만 밝힌 한 해병대 장교가 “군사 혁명이 일어 났습니다”라고 알려 왔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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