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화에서 영웅들이 겪는 고난은 우리의 마음에 절실히 다가온다. 왜냐하면 그들의 고난은 우리가 삶에서 경험하는 어려움의 또 다른 표현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들이 고난을 극복하는 과정을 보면서 삶에서 승리할 수 있다는 용기를 얻게 된다.중국 신화에서 요(堯) 임금과 더불어 태평성대의 군주로 일컬어지는 성군 순(舜)의 삶이 그러했다. 그는 정말 인간으로서 감당하기 어려운 고초를 인내와 덕성으로서 이겨냈고, 그럼으로써 인간 승리의 모범이 되었다.
순의 아버지는 장님으로 이름을 ‘고수( )’라 하였다. 고수라는 글자 자체가 ‘눈 먼 늙은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고수가 어느 날 꿈을 꾸었는데, 봉황 한 마리가 쌀을 물고 와 그에게 먹여주면서 자손을 점지해 주고 가버렸다.
그 후 얼마 안가서 아들을 낳게 되었으니 그가 곧 순이다. 순은 태몽도 신기했지만, 눈동자가 둘인 기이한 아이였다. 그래서 중화(重華)라고도 불렀다. 눈동자가 둘인 사람이라는 뜻이다.
순의 이러한 탄생신화는 몇 가지 의미를 함축한다. 첫째, 꿈에서 봉황을 보았다는 것은 그가 새 토템 민족의 훌륭한 인물임을 암시한다. 맹자(孟子)도 일찍이 말했듯이 순은 동이계(東夷系)종족 출신인데, 그들은 새를 토템으로 삼고 있었다.
다음 눈동자가 둘이라는 표현은 순에게만 주어진 것이 아니었다. 고대 중국에서는 비범한 사람의 모습을 형용할 때 눈과 관련하여 이런 표현을 썼는데, 가령 춘추(春秋) 시대의 강력한 군주였던 진문공(晉文公)도 눈동자가 둘이었다고 한다.
순은 이렇게 태어났으나 그의 삶은 기구하였다. 어머니가 그를 낳은 지 얼마 안되어 돌아가시고 계모가 들어오는 일종의 가정 비극이 시작된 것이다. 계모는 자신이 낳은 아들 상(象)과 함께 순을 학대하였다.
더욱 어처구니 없는 것은 고수가 계모와 이복 동생 상의 말만 듣고 순을 더욱 학대한 것이다. 신화에서 순의 아버지를 장님으로 설정한 것은 시각 장애보다 마음의 장애를 표현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그는 사리에 어둡고 인정에 밝지 못한 인간이었기 때문이다. 어질고 효심 깊은 순은 반항하지 않고, 모든 학대를 견디었다고 한다. 고수는 매일 구타하였는데 그는 가만히 참고 맞았다 한다.
때로 큰 몽둥이로 때리면 도망쳤다고 한다. 맞기 싫어서가 아니라, 그것을 맞고 죽으면 아버지께 큰 불효가 될까 였다고 하니 효심도 이 정도면 상상을 초월한다.
순은 결국 집에서 쫓겨나고 말았다. 쫓겨난 순은 이곳 저곳을 옮겨 살았는데 그의 어진 성품은 가는 곳 마다 사람들을 감동시켰다.
‘사기(史記)’에 의하면 그가 역산(歷山)에서 농사를 지을 때는 그곳 농부들이 모두 밭을 양보하였고, 뇌택(雷澤)에서 고기를 잡을 때는 그곳 어부들이 다투어 어장을 주었다 한다. 그가 있는 곳에는 언제나 사람들이 모여들어 마을을 이루었다 한다.
순이 이렇게 훌륭하다는 소문은 온 나라에 퍼졌다. 그러자 대신들이 요 임금에게 다음의 임금감으로 순을 추천하였다. 요 임금은 순에게 아황(娥皇)과 여영(女英) 두 공주를 시집 보내고 아홉 아들들을 보내 순의 생활을 직접 지켜보게 하였다.
순은 지위가 달라졌다고 해서 교만하지 않고, 여전히 고수와 계모를 효성스럽게 모시고, 상을 자애롭게 대하였다. 눈엣가시처럼 여기던 순이 임금님의 사위가 되자 고수와 그 가족들은 시기와 증오심에 몸을 떨었다. 특히 동생인 상은 더욱 적개심을 가졌다.
그들은 상의 적극적인 주장에 따라 순을 죽이고 재산과 아내를 빼앗기로 결정하였다. 궁리끝에 한 가지 계략을 꾸몄다. 유향(劉向)의 ‘열녀전(列女傳)’에 의하면 고수가 순에게 곡식 창고의 지붕을 수리하라고 시켰다 한다.
순이 두 공주에게 얘기했더니 새 무늬가 있는 옷을 만들어 입고 가게 하였다. 순이 지붕에서 작업을 하고 있는데 고수가 사다리를 치우고 밑에서 불을 지르는 것이 아닌가! 순은 두 공주가 만들어 준 신기한 옷 덕분에 새처럼 날아서 내려왔다 한다.
‘사기’에서는 순이 미리 두 개의 갓을 준비해 뒀다가 그것을 펼쳐서 내려왔다는 식의 다소 과학적인 설명을 하고 있다.
첫번째 음모가 실패하자 두 번 째 음모를 꾸몄다. 이번에는 아버지 고수의 명령으로 우물을 치게 한 것이다. 그러자 두 공주는 용 무늬가 있는 옷을 순에게 입혀서 보냈다. 한참 우물 밑 바닥에서 작업을 하고 있는데 위에서 돌과 흙이 쏟아졌다.
순은 용처럼 우물 밑의 물길로 빠져 나왔다. ‘사기’에서는 순이 미리 파둔 통로로 탈출하였다고 말하기도 한다. 이 때 상은 정말 순이 죽은 줄 알고 공주와 재산을 차지할 꿈에 부풀었다. 그리하여 순의 집에 와서 제멋대로 순의 거문고를 타고 있었다. 그 때 순이 집안으로 들어오질 않는가?
이 사건 이후에도 순의 가족들에 대한 성실한 태도는 변함이 없었다. 회개할 줄 모르는 악독한 상과 고수는 다시 음모를 꾸몄다. 순을 술자리에 초대를 해 취하면 죽여 내버리려고 한 것이다. 두 공주는 순이 가기 전에 신기한 약으로 목욕을 하게 했다.
잔치에서 고수는 순에게 쉼 없이 술을 권했다. 그러나 공주의 약 덕분에 순은 조금도 취하지 않고 돌아올 수 있었다. 그리고 최후에 요 임금의 시험마저 통과해 마침내 임금의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
임금이 되고 난 후에도 순은 고수와 계모, 상을 대하기를 전과 다름없이 하였다. 심지어 상을 ‘유비(有鼻)’라는 지역의 제후로 봉하기까지 하였다.
그러자 마침내 그 모질게도 악했던(이를 완악ㆍ頑惡하다 라고 한다) 가족들도 뉘우치면서 점차 선한 길로 들어섰다고 한다. 순의 효심과 어진 마음이 결국 승리를 거둔 것이다.
순은 요 임금의 뒤를 이어 백성들에게 선정을 베풀어 이른바 ‘요순시대’라는 태고의 가장 이상적인 시대를 구현하였다. 순은 음악을 좋아하여 ‘남풍가(南風歌)’라는 노래를 지어 불렀다 한다.
악공들을 시켜 거문고를 개량하게 하고, 구소(九韶)라고 하는 악곡을 짓게 하였는데 후세에 공자는 순의 구소를 가장 완벽한 음악으로 칭송하였다.
순과 두 왕비에게도 만년이 찾아왔다. 그런데 그들의 최후는 다소 비극적이다. 순은 남쪽 지역을 두루 돌아보던 중 창오(蒼梧)라는 들녘에서 그만 객사하고 말았다. 다른 민간 전설에 의하면 순이 사람을 해치는 거대한 구렁이와 싸우다 죽었다고도 한다.
두 왕비는 눈물을 뿌리며 남쪽으로 갔는데 그 때 눈물 방울이 대나무에 떨어져 강남 지역의 대나무는 오늘날에도 반점이 남아 있다고 한다. 두 왕비는 상수(湘水)라는 강을 건너다 풍랑을 만나 빠져 죽고 말았다. 후에 두 왕비의 혼은 상수의 여신으로 화하였다.
순의 신화에서 그가 계모에게 학대받다 공주와 결혼하는 성공담은 마치 신데렐라 이야기를 남성의 경우로 바꾸어 놓은 듯하다. 일부 학자들은 순 신화가 원시시대의 야수를 길들이거나, 사냥하는 데에 뛰어났던 수렵 영웅에 대한 숭배의 흔적을 담고 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완악한 가족을 변화시키는 과정을 맹수를 길들이는 과정으로 파악할 수 있다는 것이다. 아닌게 아니라 동생 상은 가장 덩치 큰 동물인 코끼리로 불리워지고 있다. 고대 중국은 기후가 온난해 코끼리가 많았고, 순 신화는 당시 코끼리를 길들였던 현실을 반영했다는 것이다.
순 신화는 그러나 요 신화처럼 후세 유학자들에 의해 교육적으로 각색된다. 순을 철두철미한 효자로 묘사한다. 우리의 마음에 묘한 여운을 남기는 것은 순과 두 왕비의 비극적인 최후이다.
행복한 순 부부의 뜻밖의 불행, 이야기의 급격한 파국이 의미하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순의 객사, 민간 전설에서 암시하고 있는 순의 피살, 그리고 두 왕비의 잇따른 횡사, 물귀신이 되어 떠도는 그들의 깊은 한은 어떤 사실을 감추고 있는 것일까?
후세의 유학자들에 의하면 요에서 순, 순에서 우(禹)는 ‘선양(禪讓)’이라는 양보의 방식으로 덕있는 사람에게 왕권이 전해졌다고 한다.
우리는 혹시 순과 우 사이에 존재했던, 선양과는 거리가 먼 피비린내 나는 폭력의 냄새를 맡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유학자들이 자신들의 이데올로기를 위하여 그토록 이상화했음에도 미처 은폐하지 못한 폭력의 냄새를.
글 정재서 이화여대 중문과 교수
■남풍가(南風歌)-태평성대 상징 순임금때 노래
순이 친히 오현금(五弦琴)을 타며 불렀다는 노래로 가사는 다음과 같다.
"훈훈한 마파람이여, 우리백성들의시름을 없애주리, 때 맞춰 부는 마파람이여, 우리 백성들을 가멸게 하라." 요 임금때의 격양가(擊壤歌)와 더불어 태평성대를 상징하는 노래다. 그러나 두 노래 모두 요, 순 시대에 지어진 것이 아니고 후세에 그 시대를 이상화하기 위하여 위작(僞作)된 것으로 보는 것이 정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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