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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세피난처/ 탈세·외화유출 창구…國富유실 주범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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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세피난처/ 탈세·외화유출 창구…國富유실 주범으로

입력
2002.08.2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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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세피난처(Tax Haven)를 통한 국부유출이 심각하다. 외환자유화 조치 등으로 국제 자본거래가 급속히 증가하면서 조세피난처에 역외(域外, offshore)펀드 등 서류상 회사(Paper Company)를 설립, 세금을 탈루하거나 해외로 자금을 빼돌리는 사례가 급증하고 있는 것이다.국세청이 최근 조세피난처를 탈세 창구로 이용한 65개 기업 및 개인에 대해 이례적으로 세무조사의 칼을 빼든 것도 더 이상 조세피난처를 이용한 국부유출을 좌시할 수 없다는 판단에서다. 조세피난처는 자금추적이 어려워 불법자금의 세탁경로와 국내증시를 교란하는 국제투기성자금(hot money) 및 '검은머리 외국인'의 본거지로 이용되고 있어 대책마련이 시급하다.

■조세피난처를 통한 국부유출의 실태

A벤처캐피탈은 말레이시아 라부안 등지에 설립한 6∼7개의 역외펀드를 통해 주식거래로 국내 증시에서 150억원의 시세차익을 얻었지만 한국과 말레이시아 어디에도 세금 한푼 내지 않았다. 라부안은 자본거래로 얻은 소득에 전혀 과세를 하지 않는 조세회피지역(사실상의 조세피난처)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근 국세청 세무조사에서 A사는 이들 펀드의 실질적인 운영주체로 드러나 135억원의 법인세 등을 추징당했다.

탈세 목적으로 조세피난처를 이용하는 사례는 점차 증가하는 추세다. 국세청 자료에 따르면 국내 기업 등이 조세피난처 국가와 체결한 국제거래는 1999년 491억달러(약64조원)에서 지난해에는 585억달러(약76조원)로 19% 늘었다. 이 가운데 실물거래는 351억달러(약45조원)로 10% 증가한 반면 자본거래는 160억달러(약20조원)로 23%나 늘었다. 국세청 관계자는 "자본거래가 상풍거래에 비해 대규모 탈세를 하는데 더 수월하기 때문에 자본거래의 속도가 빨라지고 있다"며 "자본거래가 늘어날수록 탈세가 늘고 국부유출도 그만큼 많아진다"고 지적했다.

경제개발협력기구(OECD)가 공식지정한 35개 조세피난처 국가와 홍콩,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등 동남아시아의 조세회피지역에 진출한 한국기업의 지사와 현지법인은 1,700여 개에 이르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이들 지역과의 불법 외환거래 적발액도 2000년 3,300억원에서 지난해 1조3,363억원으로 한해 동안 4배 이상 늘었다. 이들 지역에서 탈세가 이뤄지는 유형은 ▲조세피난처를 경유지로 이용해 국내투자자금에 대한 이자소득세를 회피하거나 ▲조세피난처에 특허권 등을 위장등록해 로열티에 대한 과세를 회피하고 ▲국내 부실기업 주식을 인수 양도하면서 양도차익에 대한 과세를 회피하는 방법 등이다.

조세피난처는 또한 비자금을 유출하는 통로로 이용되기도 한다. 제일화재 이동훈 회장은 말레이시아의 역외펀드에 불법출자하면서 42억원의 비자금을 조성, 여행경비 등 개인용도에 사용한 혐의로 지난해 기소된 바 있다. 국세청 한상률 국제조사담당관은 "조세피난처를 경유하는 자금거래는 탈세와 함께 불법 외화유출의 가능성이 커 국부 유실의 창구가 되고 있다"며 "조세피난처를 통해 사라지는 세금은 결국 중소기업과 근로자의 부담으로 돌아가게 된다"고 지적했다.

■불법자금 유통과 시장교란의 주범

조세피난처에 역외펀드를 설립할 때 자금의 출처 및 소유자를 밝힐 필요가 없기 때문에 조세피난처는 불법자금의 주요 유통경로가 된다. 과거에는 선거자금의 세탁에 활용되기도 했으며 최근에는 투기성 핫머니나, 실제로는 국내자금인 '검은머리 외국인' 자금이 조세피난처를 경유해 국내로 흘러 들어 종종 시장을 교란하고 있다.

현대그룹 주가조작 사건은 검은머리 외국인의 대표적인 사례. 98년 현대그룹이 라부안에 역외펀드를 설립한 뒤 현대전자 주식을 대거 매집하면서 주가를 조작한 사건으로, 자체 자금을 외국인 투자자금으로 둔갑시켜 마치 외국인이 주식을 산 것처럼 주가조작을 시도한 것이다.

조세피난처를 경유한 자금은 계열사 불법지원에 쓰이기도 한다. 모제약사는 라부안의 역외펀드를 이용해 관계회사인 창투사에 70억원 가량을 지원한 사실이 최근 적발돼 41억원의 법인세 등을 추징당했다.

금융감독원 백영수 외환감독국장은 "단 1달러의 역외펀드 투자도 감독당국에 신고하도록 되어 있지만 불법자금은 신고없이 나가기 때문에 주가조작 등 사건이 불거진 뒤에야 유·출입을 확인할 수 있다"며 "국내·외 기관과의 긴밀한 정보공유를 통해 조세피난처 거래를 근절하는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고 말했다.

김정곤기자 kimjk@hk.co.kr

■조세피난처/ 35개國 세금없거나 명목상 세금만 거둬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는 2000년 6월 세금이 전혀 없거나 명목상의 세금만 부과함으로써 다국적 기업 등이 조세회피나 자금세탁 목적으로 활용하는 35개국을 조세피난처로 공표, 국제거래 질서에 미치는 악영향을 지적했다.

이 가운데 8개가 카리브해 연안에 있으며 3분의 2이상은 영국령이다. 바하마 바베이도스 마샬군도 몰디브 모나코 파나마 버진아일랜드 도미니카 바레인 통가 리히텐슈타인 등이 대표적인 조세피난처.

국세청이나 관세청 등 우리 과세당국은 이외에 말레이시아와 홍콩, 싱가포르 등 동남아3국을 조세회피성 국가로 지목, 외환불법거래나 탈세혐의에 집중하고 있다. 그러나 홍콩의 경우 우리나라와 조세조약이 체결돼 양국 거래에 대해서는 국내 세법에 따라 언제든지 과세할 수 있고, 싱가포르는 주식양도 소득에 대해 과세한다는 조세조약이 맺어져 있다. 때문에 실제 국내기업이나 투자자들이 탈세나 불법자금 유통을 목적으로 자금을 거래할 때는 홍콩이나 싱가포르보다 말레이시아를 선호하고 있다.

카리브해 연안국가보다 국내에 조세피난처로 더 잘 알려진 말레이시아의 '라부안'섬은 마하티르 말레이시아 총리의 고향이기도 한 유명한 휴양지. 서울증권을 인수한 조지 소로스의 펀드 본사가 이곳에 있다는 소식이 공개된 1999년부터 우리나라에 널리 알려졌다. OECD 지정국에서는 제외됐지만 기업설립이 자유롭고 기업의 투자활동과 관련한 소득에 과세를 하지 않는 등 사실상 조세피난처의 기능을 하고 있기 때문에 국내 기업들이 가장 애용하는 피난처의 하나다. 한국은행에 신고된 78개의 역외펀드 가운데 34개의 소재지가 라부안이다.

조세피난처는 역외펀드의 집산지로 알려져 있다. 국내에서 자금이 조성되는 역내펀드와 달리 자산운용상의 규제가 거의 없는 외국에 설립된다는 의미에서 역외펀드라고 하는데, 통상 조세피난처에 설립된다. 라부안에서는 펀드를 만드는 데 단 하루면 충분하다. 직접갈 필요도 없이 팩스만 넣으면 바로 설립이 가능하고 한국어 통역서비스까지 지원될 정보로 국내 기업이나 투자자가 '최고의 고객'으로 대우받는다.

■조세피난처 사라질까/7개국+동남아 3국 "과세권 침해" 계속 반발

조세피난처를 처음 문제삼은 나라는 미국이다. 1996년 선진7개국(G7) 회담에서 조세피난처가 과세기반을 잠식하고 불법자금의 온상이 되고 있다며 규제를 주장하고 나섰다. 실제 미국 플로리다에 접해있는 카리브해 연안의 도서국가들은 비과세 정책으로 미국 자금을 대거 끌어드려 세계적인 조세피난처 역할을 했다.

국제 문제로 부각된 조세피난처는 97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로 논의의 장이 확대돼 '해로운 세금경쟁 포럼(Forum on Harmful Tax Competition)'이 결성되고 2000년에는 35개국 명단이 발표되기에 이른다. OECD는 조세피난처 국가와 막후 협상에 들어가 35개국 가운데 28개국으로부터 2005년까지 유해조세제도를 폐지하고 금융정보를 포함한 정보교환에 응한다는 약속(commitment)을 받아냈다. 나머지 7개국은 협조를 약속하지 않아 국제조세와 관련한 '깡패국가(rogue state)'로 남게 됐다. 이들 국가는 '기업이 세금을 덜 거두는 국가나 지역으로 이동하는 것은 당연한 일인데, 이를 막으려는 것은 과세주권을 침해하는 신식민주의적 발상'이라고 반발하고 있다.

국제금융센터를 두고 국제자본을 유치하는 홍콩,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등 동남3국도 앞으로 계속 감세정책을 취한다는 입장이어서 조세피난처를 없애겠다는 국제기구의 노력에 걸림돌로 작용하고 있다.

OECD는 일단 비협조국가 7개국과 동남아국가를 상대로 설득노력을 강화한다는 방침이다. 조세피난처 기능을 하는 지역이 일부라도 남게되면 그 쪽으로 '검은 자금'이 몰려 국제적인 철폐 노력이 물거품이 되기 때문이다.

국세청 관계자는 "조세피난처를 이용하려는 핫머니 등 수요처가 있는 이상 지구상에서 조세피난처를 완전히 몰아내는 게 쉬운 일은 아닐 것"이라고 지적했다.

김정곤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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