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일 새벽 서해 공해상을 통해 귀순한 21명 중 최연장자인 순종식(荀鍾植ㆍ70)씨는 재작년 중국에서 남한의 동생을 직접 만나 처음 탈북의 뜻을 전한 것으로 밝혀졌다.순종식씨의 동생 봉식(奉植ㆍ53ㆍ공인중개사ㆍ대전 중구 선화동)씨는 이날 큰형의 무사 귀순 소식에 모처럼 환하게 웃으며 그동안 가슴에 묻어 두었던 안타까운 사연들을 털어놓았다.
한국전쟁 때인 1951년 5월 고향인 충남 논산시 부적면 신교리 안골마을에서 19살 나이로 인민군에게 끌려간 뒤 소식이 끊겼던 큰형의 생존사실을 알게 된 것은 1995년 백두산 관광을 다녀온 친구로부터였다.곧 이어 논산경찰서를 통해 편지가 전달돼 왔다.
장조카 용범(46)씨가 아버지의 소원을 풀어주기 위해 끈이 닿은 재중동포들에게 백방으로 부탁했던 것. 이후 몇 차례 재중동포들을 통한 서신 왕래가 이뤄졌다.
1998년 2월 봉식씨는 직접 중국에 가 서신왕래를 도와준 교포에게 부탁해 약속시간에 압록강변에 나온 큰형의 모습을 먼발치로 바라볼 수 있었고 편지와 가족사진도 전해 받았다. “불효자를 용서해달라는 형님의 편지를 읽어드렸더니 어머니가 한없이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다음달 돌아가신 어머니 품에 형의 편지와 가족사진을 넣어드렸습니다.”
다시 2년 뒤인 2000년 12월 초 봉식씨는 다시 중국에 가 형과 장조카 용범씨를 상봉했다. “용범이가 고깃배에 형님을 태워 단둥(丹東) 인근 동항(東港)시로 왔는데 어머니를 쏙 빼닮은 형을 금방 알아 볼 수 있었습니다.”
봉식씨는 3일간 형과 같이 지내면서 탈북 의사를 처음 전해들었다. 조카는 “아버지 생전에 고향을 보여드리고 자식들도 자유로운 세상에서 제대로 교육시키고 싶다”며 “죽는 한이 있어도 가겠다”고 굳은 의지를 밝혔고 봉식씨는 “북에 남겨진 가족은 고초를 겪어야 하니 전가족이 와야 한다”며 “도와줄 수 있는 일이라면 뭐든 돕겠다”고 격려했다.
“이후 탈출자금이라도 건네줄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아무런 연락이 없다가 느닷없이 뉴스에서 귀순소식을 듣고 깜짝 놀랐다”는 봉식씨는 “조카가 쥐도 새도 모르게 준비를 하느라 연락을 하지않은 것 같다”고 말했다.
첫째 동생 동식(東植· 60ㆍ양돈업ㆍ충남 홍성군 홍북면)씨도 “관계기관의 조사가 끝나는 대로 형님을 모시고 우선 부모님 산소부터 찾겠다”며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한편 종식씨의 고향마을 주민들도 한결같이 탈북소식에 놀라워 했다.
고향 후배 이관주(李官周ㆍ69)씨는 “종식이형이 의용군에 끌려가던 때가 생생하다”며 “죽은 줄 알았다가 몇 년전에야 살아있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탈북까지 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이장 임성규(林成奎ㆍ61)씨는 “동네 주민들과 의논해 종식이 형이 이곳 부친 묘소에 성묘하러 올 때 환영 잔치라도 벌여야 겠다”고 말했다.
/대전ㆍ논산ㆍ홍성=허택회기자 thheo@hk.co.kr 이준호기자junhol@hk.co.kr 전성우기자swchun@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