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니까 그런 것이다. 그렇지 않으므로 그렇지 않은 것이다.” 장자(莊子) 제물론(齊物論)에 나오는 말이다. 세상사가 장자의 말대로 시비가 명쾌하게 가려지면 얼마나 좋을까? 그렇지 않은 일이 흔하기 때문에 세상살이가 팍팍하고 어려운 선택과 조정의 문제가 따른다.주5일 근무제를 놓고 말이 많다. 말이 너무 많아 무엇이 그런 것이고 무엇이 그렇지 않은 것인지 헷갈릴 지경이다.
이 달 초에 대한상의 박용성 회장이 노동부 장관에게 공개서한을 내 재계 입장에서 그런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밝히고 따졌다.
그 내용을 보면 보통 경제학자가 썼음직하게 사리에도 맞고 설득력이 있다. 이렇게 들이대는 ‘몽둥이’ 글에 대해 노동부 장관의 ‘홍두깨’ 글은 아직 나오지 않았다. 기자들을 상대로 ‘대한상의 서한문에 대한 정부입장’이라는 글만 나왔을 뿐이다. 노동부 입장이라고 해야 할 이 글은 유감스럽게도 대한상의 서한문보다 설득력이 크게 떨어진다.
노동부는 주5일 근무제가 김대중 정부의 공약이자 주요 정당의 공약이며 국민 대다수의 지지를 받고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그러나 이는 대수로운 것이 아니다. 김영삼 정부 때부터 추진했고 전문가와 국민의 지지를 받은 의약분업이 졸속으로 시행되는 바람에 만신창이가 되지 않았는가?
주5일 근무제는 의약분업에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국민경제에 큰 영향을 미친다. 대부분의 전문가들은 현 상황에서 주5일 근무제를 정부 입법으로 서둘 일이 아니라고 지적하고 있다.
박 회장 서한의 핵심은 주5일 근무제를 도입하려면 두 가지가 꼭 반영돼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는 노는 제도와 일하는 제도 둘 다 국제기준에 걸맞게 고치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기업에 부담이 큰 만큼 근로자도 그 부담을 나누어야 한다는 것이다. 두 가지 모두 자명한 명제이다. 이 명제를 도외시하면서 주5일 근무제를 도입하려는 데에 문제가 있다.
정부는 주5일 근무제를 처음 추진할 때부터 잘못 접근했다. 개발 연대에 노동운동을 ‘안보’라는 이름으로 탄압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근로자에게 선진국보다 후한 휴가제도라는 당근을 주어 온 것이 사실이다. 선진국에서는 실제 노동시간이 주 40시간 이하로 떨어졌을 때 주5일 근무제가 도입되었지만 현재 우리나라의 실제 노동시간은 주 48시간 안팎이다.
이런 상황에서 주5일 근무제를 강요하면 중소기업과 국가경쟁력에 심대한 부담이 된다. 이 냉엄한 현실을 노동계에 주지시켜 노동계가 응분의 비용분담을 해야만 주5일 근무제를 추진할 수 있다고 나왔어야 올바른 접근 방법이다.
정부는 이런 원칙이 없이 노사정위원회에 맡겼다. 노사정위는 기본적으로 정(政)이 노와 사의 입장을 산술평균하겠다는 자리다. 노동계가 기업현실이나 경쟁력을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 입맛에 맞는 요구를 모르쇠로 밀고 나간 것은 이 때문이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는 게 경제의 제1 원칙이다. 경제를 안다는 대통령의 정부에 대해 “돈은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고 재계가 새삼 하소연하는 것은 통렬한 희극이 아닐 수 없다.
권위주의 시대라면 박 회장의 서한은 크게 손봐 주어야 마땅한 무엄하기 짝이 없는 글이다. 그러나 민주주의 시대에 이 글은 중요한 국가정책을 진지하게 공론화하는 계기로 활용되어야 한다. 노동부 장관은 노동계의 지혜까지 빌어 박 회장과 전문가들을 설득시킬 수 있는 ‘홍두깨’ 글을 당당하게 보내야 한다. 설득시킬 수 없으면 노동부가 강조하는 ‘노사가 공감하는 합리적인 법안’은 공염불이 되기 때문에 정부안 마련을 중단하는 것이 옳다.
차기 정부에서 자명한 두 명제를 충족시킨다는 전제 하에 주5일 근무제를 종합적인 방법으로 다시 접근하는 것이 순리이다. ‘좋은 게 좋다’는 생각과 치적에 집착하여 후유증이 큰 졸속개혁, 즉 사이비개혁을 해선 안 된다. 그런데도 그렇지 않은 것, 개혁이라는데 개혁이 아닌 것이 졸속개혁이다.
안국신 중앙대 경제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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