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 아침, 출근하는 길목에서 샛노란 달맞이꽃 무리를 보았습니다. 모처럼 갠 파란 하늘과 어우러져 참 곱구나 생각했습니다.그곳은 얼마 전 만해도 파릇한 벼들이 자라는 생산력이 왕성한 논이었는데 어느날 논바닥 가운데 소복이 흙무더기들이 쌓이더니 황량한 공터로 변해버렸습니다. 그리 멀지 머지않아 콘크리트로 된 육중한 아파트들이 올라가겠지요.
그런데 그리 길지 않은 기간 동안 그 땅을 달맞이꽃이 차지해 아침을 밝게 하고 있습니다. 사실 달맞이꽃은 귀화식물이라 그간 제 마음속으로 그리 반기는 식물은 아니었어요.
그런데 오늘 아침 풍광을 보고 있자니, 잠시 틈을 보인 망가진 땅을 녹색으로 덮어내는 그 놀라운 생명력과 노란 꽃 무리가 주는 아름다움에 다시 한번 그 꽃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달맞이꽃은 이름 그대로 달을 맞이하는 시간, 즉 저녁에 꽃을 피웁니다. 왜 하필 저녁에 꽃을 피울까 생각해 보았는데 아무래도 전략은 차별화에 있지 않을까 싶더군요. 그때는 다른 꽃들은 꽃잎을 닫고 있으니 찾아오는 곤충도 고를 수 있겠지요.
달맞이꽃은 무더운 여름, 그 중에서도 기온이 높게 올라가는 길 옆(특히 아스팔트)에 피기 마련이니 에너지관리 차원이 아니겠는가 하시는 분도 있습니다.
재미난 것은 저녁에 찾아 드는 곤충과의 관계에 있습니다. 밤에 활동하며 꽃을 찾는 대표적인 곤충에 박각시나방이 있습니다. 박각시라는 이름은 역시 밤에 꽃잎이 벌어지는 박꽃을 찾아가 그 앞에서 윙윙대며 꿀을 빨고 있으니 신랑인 박을 찾아온 각시라는 뜻이랍니다.
어쨌든 이 야행성 박각시가 달맞이꽃에게도 아주 좋은 친구인데 문제는 이 박각시의 몸통이 비늘조각으로 덮혀 있어서 꽃가루가 잘 붙지 않는답니다.
물론 이 정도 어려움에 물러설 달맞이꽃이 아니지요. 달맞이꽃은 마치 실에 구슬을 꿰듯, 가느다란 실 같은 것에 꽃가루들을 줄줄이 꿰어 놓아서 박가시나방의 한 부위에 한 번 묻게 되면 마치 실타래가 풀리듯 줄줄이 풀려 나와 한번에 많은 꽃가루의 운반이 가능하도록 만들었답니다.
달맞이꽃의 수술을 가만히 관찰하면 이 가는 실 같은 부분을 볼 수 있습니다. ‘안되면 되게 하는’ 투철한 정신이 놀라울 따름입니다.
달맞이꽃이 재미있어져서 책을 찾다 보니 시간별로 꽃이 피는 모습을 찍어놓은 사진이 있더군요. 봉오리에서 완전히 꽃이 필 때까지 17분, 약간 벌어지고 나서는 2~3분 만에 꽃이 활짝 피더라구요.
사람이 인지할 수 있는 놀랄만한 속도였는데 아직 한 번도 그 꽃 앞에서 꽃 피는 것을 보며 시간을 보낸 적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바쁘다는 핑계로 방학이 다 가도록 아이에게 꽃구경 한번 제대로 시켜주지 못한 것이 마음에 걸렸는데 오늘 해가 기울 즈음, 저녁산책이나 나가야겠습니다.
필 듯 말 듯한 달맞이꽃 한 송이 잘 골라서 꽃피는 모습을 보고, 시간도 재어 본다면 아이에게도 제게도 좋은 체험이 될 듯 합니다.
/이유미ㆍ국립수목원 연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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