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개국 200여명 참가 15~18일 열려창립 50돌을 맞은 역사학회(회장 이주영 건국대 사학과 교수)가 미국에 본부를 둔 세계사학회(World History Association)와 공동개최한 ‘2002 역사학 학술회의’가 15~18일 서울대에서 열렸다.
‘역사 속의 한국과 세계’를 주제로 한 학술회의에는 세계 11개국의 학자 교사 등 200여명이 참가해 ‘세계화’에 부응하는 역사 연구의 새 방향 등을 논의했다.
1982년 설립된 세계사학회는 거시적 세계사 연구와 세계사 교육 확산에 노력해왔으며 현재 30여개국 1,300여명의 회원 중 30% 이상이 교사다.
이번 회의에는 세계사학회의 제안으로 역사교육 연구자들과 현직 교사들도 참가해 세계사 교육 발전 방안에 대해 열띤 토론을 벌였다. 주요 논문과 토론 내용을 짚어본다.
■국사, 지역사의 틀을 넘어
기존 역사학은 연구대상을 지나치게 세분화함으로써 더러는 자국 또는 지역적 이해에 매몰되는 폐해를 낳았다.이번 회의에서는 이런 낡은 틀을 벗어나 국가간, 지역간 공통분모를 찾고 문화 다양성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히는데 초점이 맞춰졌다.
케네스 포머런츠 미국 UC어바인대 교수는 16일 ‘세계 경제사 속의 동아시아와 북대서양’이란 기조강연에서 동아시아의 발전 모델을 유럽과 전혀 다르다거나 아류로 보는 시각을 비판했다.
그는 “산업혁명 전 유럽의 사회 변화상은 중국에서도 유사하게 나타났고 당시 중국, 특히 양쯔강 유역은 유럽보다 훨씬 윤택했다”면서 “다만 19세기 이후 중국은 일본처럼 국가의 강력한 지원 아래 산업의 질적 발전을 꾀하지 못해 쇠퇴했다”고 주장했다.
그는 또 “투자결정 과정의 정부간섭, 노동집약산업 집중 등 흔히 말하는 ‘동아시아 모델’의 특징들은 유럽에서도 발견되며 상당수는 일본을 통해 의식적으로 모방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차하순(車河淳) 서강대 명예교수는 마지막 날 기조강연에서 세계화와 지역주의의 공존 가능성을 모색했다.
그는 “세계화는 로마제국, 유럽의 르네상스, 중국문명의 동아시아 지배 등 과거에도 경험한 일”이라며 “한국과 일본이 중국 문화의 지배 하에서도 독자적 문화를 유지, 발전시켰던 것처럼 오늘날에도 세계화 민족주의 지역주의를 결합한 ‘글로칼리즘(Glocalism)’을 통해 독자적이면서 보편성을 띤 지역 문화를 구축할 수 있다”고 역설했다.
■동아시아 역사교육 갈등의 뿌리
백영서(白永瑞) 연세대 사학과 교수는 “동아시아 대부분이 국사와 세계사를 분리하고 세계사를 다시 동양사와 서양사로 나누는 등 일본이 19세기 말 ‘국민국가’ 강화 과정에서 채택한 교과서체제를 오늘날까지 답습하고 있다”라면서 “특히 그 토대인 ‘진화론적 문명사관’에 머물고 있는 상황에서 ‘역사 기억’을 둘러싼 국가간 갈등은 필연적 결과”라고 지적했다.
그는 “각국이 국가 주도의 교과서 제도를 개혁해 역사를 ‘국가의 기억’에서 ‘공공(公共)의 기억’으로 전환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주장했다.
니타디 사다오 일본 사회학교육원 대표는 “일본의 1940년대 전시동원체제는 패전으로 막을 내렸지만 ‘국가적 통일성’ 체제는 내용을 달리하면서 잔존한다는 것이 문제”라면서 “국가 역사의 체제를 제거하고 동아시아를 아우르는 역사로 발전시켜야 한다”고 지적했다.
■국내 세계사 교육의 문제점
국내 중ㆍ고교 역사 교사들이 세계사 교육의 문제점을 토론하고 대안을 찾는 자리도 마련됐다.
김범석 중산고 교사는 “학교 교육이 대학입시에 발목 잡힌 현실에서 세계사가 교과 편성 및 수능시험에서 선택 과목으로 바뀌면서 존폐 기로에 섰다”고 지적했다.
최소옥 신림중 교사는 “중학과정에서는 세계사가 ‘통합사회’에 편입돼 역사 비전공자가 세계사를 맡는 일이 비일비재하다”고 전했다.
정 연 영락고 교사는 “제도나 사건 나열 식의 교과서 내용도 문제”라면서 “역사학계가 교육을 등한시해온 과거를 반성하고 다양한 교육 자료를 개발하는 등 세계사 교육 제자리 찾기에 앞장서야 한다”고 촉구했다.
이희정기자jaylee@hk.co.kr
◆"한국,문회교류사에서 중요역할" 미국내 한국사 '전도사' 하이디루프.김영진씨
한일월드컵을 계기로 한국이 많이 알려졌지만 아직도 미국 학생들의 태반은 한국이 어디에 있는 나라인지도 모른다.
하이디 루프(61) 전 세계사학회 회장과 코리아 소사이어티의 한국학프로그램 책임자 김영진(59)씨는 미국 학생들에게 한국의 역사와 문화를 알리는데 함께 애써온 숨은 공로자들이다.
역사학 학술회의에 나란히 참석한 이들은 “한국사 교육을 확산하려면 교사들부터 한국에 관심을 갖게 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고교 연극교사였던 루프씨는 “제일 똑똑하다는 학생이 ‘중국에 가서 도요타 공장을 보고 싶다’고 말하는 것을 듣고 충격을 받아” 세계사 교육에 눈을 돌렸다.
콜럼비아 대학원을 거쳐 역사교사로 전신한 그는 동서교류사를 연구하면서 고구려 출신의 당(唐) 장수 고선지(高仙芝)에 매료돼 한국에 각별한 관심을 갖게 됐다.
“명장 고선지는 3차 서역정벌에서 패해 역사의 전면에서 사라졌지만 그의 부하였다가 포로가 된 제지장(製紙匠)을 통해 제지술이 유럽에 전해짐으로써 유럽문화 발전에 크게 공헌했다. 또 교역과 문화전파의 다리 역할을 한 한국은 고대문화사 분야에서는 중국보다 더 중요한 나라라 할만하다.”
루프씨의 ‘한국 사랑’은 김씨가 89년부터 한국국제교류재단의 지원을 받아 실시해온 미국 교사들의 한국 연수 프로그램에 참가하면서 더욱 깊어졌다. 이 때부터 두 사람은 의기투합해 한국사 교육 확산에 앞장서왔다.
김씨는 미국 교사들을 위한 한국사 교재를 개발하면서 루프씨를 필진으로 참여시켰고, 3년 전 정년퇴임한 루프씨는 교사들을 위한 세계사교육 연수 프로그램을 운영하면서 김씨가 만든 교재를 활용해 한국사 교육에 가장 주안점을 두고 있다.
루프씨는 이번 학술회의에서 ‘21세기를 위한 세계사 교육’을 주제로 교사연수 프로그램의 성과를 소개하고, 한국의 세계사 교사들과 만나 의견을 나누는 자리를 갖기도 했다.
두 사람은 “현재 미국의 세계사 교과서에는 불교, 유교문화 등을 설명하는 대목에서 한국이 잠시 언급되는 정도”라면서 “앞으로 한국의 역사와 문화가 별도의 장으로 다뤄질 수 있도록 힘쓰겠다”고 입을 모았다.
◆크로이지어 세계사 학회 회장 "자국중심의 틀 벗어나야"
“그동안 미국의 역사교육은 미국사와 그 뿌리인 유럽사 위주로 이뤄져왔다. 이는 ‘미국 우월주의’를 낳는 요인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매우 위험한 일이다.”
랠프 크로이지어 세계사학회 회장(캐나다 빅토리아대 명예교수)은 “자국 중심, 특정 지역의 틀을 벗어나 인류사에 초점을 맞춰야 바람직한 역사교육이 가능하다”고 강조한다. 크로이지어 회장은 미국 UC버클리대에서 공부한 중국 근대사 전문가이다.
_세계사 교육을 강조하는 까닭은.
“역사학은 근본적으로 휴머니티(Humanity)를 탐구하는 학문이다. 그러려면 다른 나라의 역사와 문화를 폭 넓게 이해해야 한다. 더욱이 ‘세계화’ 시대를 맞아 국가간, 지역간 연계가 갈수록 강화되고 있지 않은가.
특히 모든 사람이 대학에 진학할 수 있는 것은 아니므로 고등학교에서 제대로 된 세계사 교육을 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세계사라고 해서 모든 지역과 시대를 다 다루려 하면 겉핥기로 흐르게 된다.
우리의 관심은 ‘상호연관(Interconnection)’과 ‘비교(Comparison)’, 즉 각 나라와 지역이 어떻게 연관되어 발전해왔는가를 살피고 비교연구를 통해 문화의 다양성을 이해하는데 있다.”
_세계사학회의 활동이 거둔 성과는.
“우리의 견해가 미국 학계나 교육계의 주류로 자리잡지는 못했다. 특히 하바드대 등 소위 ‘엘리트 대학’에서는 아직도 세계사를 가르치지 않는다.
그러나 세계사에 대한 관심은 매우 빠르게 확산되고 있으며 특히 고교 역사교육에서는 상당한 성과를 거뒀다.
내가 30여년 전 중국 근현대사를 전공으로 택할 때만 해도 ‘왜 하필 중국이냐’는 질문을 많이 받았는데 요즘은 그렇지 않다.”
_일본 역사왜곡 교과서를 둘러싼 논란은 어떻게 보나.
“중국이 일본 교과서에 대해 제기하는 문제에 상당부분 공감한다. 어느 나라든 고통스런 과거를 잊고 싶어하는 경향이 있지만 역사 문제는 잊는다고 해결되지 않는다.
특히 공공 교육을 ‘국가 우월주의’ 확산에 이용하는 것은 대단히 위험한 일이다.”
_최근 한국에서는 고교 근현대사 교과서의 현 정부 미화 문제로 파문이 일었다. 동시대에 대한 역사적 평가를 언제부터 내릴 수 있다고 보는가.
“현대사에서 늘 논쟁이 돼온 문제로, 간단히 답하기 어렵다. 그러나 정부가 교육 내용에 관여해서는 안 된다. 역사는 시간적 연속성을 갖는 만큼 현대사뿐 아니라 오랜 과거의 사실(史實)에 대한 평가에도 정부가 관여해서는 안 된다.”
_미국의 세계사 연구에서 한국사는 여전히 비중이 낮은데.
“세계사학회에도 한국사 전공자는 2,3명에 불과하다. 이번 학술회의를 계기로 그동안 중국이 주축이 된 동양문화권의 일부로만 인식해온 한국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기를 바란다.
회의 폐막후 4박5일간 진행될 한국문화 체험 투어가 한국을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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