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대 대통령ㆍ부통령 선거를 한해 앞둔 1959년 야당인 민주당에서는 대통령 후보 자리를 놓고 신파(新派)와 구파(舊派)의 대립이 심했다. 모름지기 기자라면 가장 중립적인 위치에서, 가장 객관적인 시각으로 취재 현장을 지켜야 한다. 나 또한 그런 생각은 늘 머리 속에 갖고 있었지만 인간이다 보니 심정적으로 조금이라도 더 끌리는 사람이 있었다.사실 나는 장면(張勉) 박사의 신파보다는 조병옥(趙炳玉) 박사의 구파와 인간적으로 더 가까웠다. 조 박사가 대인의 풍모를 지니고 있었던 데다 선이 굵었기 때문이다. 반면 섬세한 성격의 장면 박사는 내 스타일과는 맞지 않았다.
그 해 가을 조 박사는 한때 대통령 후보 지명을 포기했다. 신ㆍ구파의 대결이 지나치게 과열, 적전 분열 모습을 보였기 때문이다.
각 지구당에 조 박사를 모함하는 각종 인쇄물이 살포된 일 정도는 그냥 넘어갈 수 있었다. 그러나 지구당 개편 대회에서 일어난 난동 사건이 자유당이 구파를 지원하기 위한 것이라는 의혹으로까지 번지자 조 박사는 고민에 빠지지 않을 수 없었다.
조 박사는 1959년 10월9일 새벽, 돈암동 자택으로 나를 불렀다. “중상모략도 모략이지만 이렇게 과열로 치닫다가는 언제 당이 쪼개질지 모르니 차라리 내가 경선을 포기할까 하는데, 이 기자 생각은 어떻소?”
‘후보 사퇴’라는 중차대한 결단을 놓고 내게 조언을 구한 것이다. 나는 그 자리서 이렇게 말했다. “제 생각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은 박사님께서 희생하실 때입니다. 2보 전진을 위해 1보 후퇴를 하는 것도 좋다고 생각됩니다”
이튿날인 10월10일 조 박사는 남산 외교구락부에 자파 민주당 간부들과 기자들을 불러 모아 놓고 전격적으로 후보 사퇴를 선언했다. 이를 사전에 안 사람은 나와 조 박사의 정치 참모였던 유진산(柳珍山) 의원 뿐이었다.
조 박사의 결단은 그러나 오래 가지 못했다. 구파측 의원들과 당원들이 연일 조 박사의 집에 몰려 가 후보 사퇴 번복을 호소했다. 민주당은 신ㆍ구파 5명씩으로 당 분규 수습위원회를 구성해 내부 정비에 나섰다. 결국 조 박사는 자신의 뜻을 굽히고 경선 출마를 다시 선언했다. 그리고 11월26일, 조 박사는 당내 대통령 후보 지명대회에서 장면 박사를 483 대 480, 3표차로 누르고 승리했다.
야당이 강력한 대통령ㆍ부통령 후보를 만들어 냈지만 정권 교체라는 꿈은 얼마 뒤 물거품처럼 사라졌다. 대통령 후보인 조 박사의 건강이 나빠지기 시작했다.
조 박사는 1960년 초 미국으로 건너가 치료를 받아야만 했다. 그 해 2월 조 박사는 미국에서 내게 직접 전화를 걸었다. “아, 이기자 수술도 잘됐고 해서 이제 곧 귀국해 선거를 치를 생각이오.”
안부 전화를 받고 바로 며칠 뒤인 2월16일 새벽이었다. 집으로 전화를 걸어 온 김성열(金聖悅) 정치부장의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이 기자, 빨리 회사로 나와야 겠어. 조 박사가 심장마비로 미국 월터리드 육군병원에서 숨을 거두었대. 빨리 기사를 써야겠어.”
눈 앞이 캄캄했다. 엄청난 충격이었다. 나는 전화통을 붙든 채 그냥 엉엉 울어 버렸다. 한참을 울다가 회사로 나온 나를 보고 김 부장이 한 마디를 던졌다. “기자는 어떤 상황에서건 냉정해야 하는데 이만섭씨는 신문기자로서는 너무 감정이 풍부한 것 같네.”
조 박사의 서거로 한달 뒤인 3월15일의 대통령 선거는 이미 끝난 셈이었다. 남은 것은 부통령 선거였다. 민주당은 부통령 선거에 전력 투구를 해야 했다. 2월28일 나는 고향인 대구로 내려갔다. 장면 민주당 부통령 후보의 선거 유세가 예정돼 있었기 때문이다.
그 날은 일요일이었는데도 학생들은 모두 학교에 가야 했다. 유세장에 사람이 모이지 않도록 하기 위해 당국에서 중ㆍ고등학교에 강제 등교령을 내렸기 때문이다. 이는 결국 끝없이 쌓여 가던 자유당 정권에 대한 국민의 분노가 폭발하는 도화선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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