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8년 12월24일 이른바 ‘24 보안법 파동’이 있었다. 자유당 정권이 국민들로부터 완전히 외면 당하는 사건이다. 자유당은 그 해 8월 보안법 개정안을 제출했다.“공산주의자들의 침투에 대비해 보다 효과적인 법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는 명분을 내세웠지만 이는 야당과 언론의 활동을 제약하는 데 목적이 있었다. 정권 연장 차원에서 기획된 술수였던 것이다.
민주당과 언론은 즉각 이에 반발했다. 민주당은 “관제 공산주의자를 양산할 악법”이라며 범국민 저지 운동에 들어 갔다. 언론도 “보안법 개정은 보안법 개악”이라고 규정하고 “이 법의 통과는 민주주의의 상실”이라고 비판했다.
1958년 12월23일 저녁이었다. 민주당은 나흘 전에 이미 법사위를 날치기 통과한 보안법 개정안의 본회의 통과를 막기 위해 의사당에서 농성을 하고 있었다.
저녁을 먹고 농성 현장으로 돌아 오던 나는 국회 총무과 직원들이 어둠 속에서 무엇인가를 창문 밖으로 몰래 나르고 있는 것을 목격했다. 자세히 보니 서류 뭉치가 옮겨지고 있었다. 모종의 음모가 진행되고 있음을 직감할 수 있었다. 서류 뭉치는 벌써 검은 지프에 실려 곧 출발할 태세였다.
난 기자실로 달려가 마침 그곳에 있던 한국일보 이원홍(李元洪ㆍ전 문공부 장관) 기자를 불러 내 함께 택시를 타고 지프를 뒤쫓았다. 당시는 전 언론이 보안법 개정에 반대를 하고 있을 때였다. 내 머리 속은 특종을 해야 된다는 생각보다는 보안법 개정을 막는 데 언론이 힘을 모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
서울역 앞을 지난 지프는 노량진, 영등포를 거쳐 부평 경찰전문학교로 들어갔다. 우리는 밖에서 기다렸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지프가 나오지 않아 일단 서울로 되돌아 왔다. 서울에서 보충 취재를 한 결과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됐다.
당국에서 그 날 밤 전국의 무술 경찰관들을 긴급히 국회 무술 경위로 급조, 특채한다는 것이었다. 싣고 나간 서류는 이력서 등 채용에 필요한 서류였다. 우리 두 사람은 곧 경향신문의 정종식(鄭宗植) 기자(전 연합통신 사장)에게 이 사실을 알린 뒤 다음날 조간에 이를 보도했다.
이튿날인 24일 새벽 덕수궁에는 무술 경위 300여명이 집결했다. 나는 급히 조병옥(趙炳玉) 박사를 찾았다. 가는 길에 치안국 특수정보과 요원과 마주쳤다. 그는 이렇게 내게 협박했다.
“이 기자가 지금 조 박사를 찾아 가는 이유를 알고 있소. 지난번 영일 선거 때는 그냥 넘어 갔지만 이번에는 몸조심 해야 할 거요.”
나는 조 박사에게 이 사실을 전했다. “지금 덕수궁에 무술 경위가 대기하고 있습니다. 아침이 되면 본회의장으로 난입할 겁니다. 그러니 그들에게 내쫓기느니 차라리 농성 침구를 치우고 본회의장을 정리한 뒤 의사진행 발언을 얻어 시간을 끄는 편이 나을 듯합니다.
그러다 보면 언론에서 무술 경위 급조 등 자유당 음모를 보도할 터이니 정치적 해결책이 나오지 않겠습니까.”
그 자리에서 내 의견을 수용한 조 박사 등 당 지도부는 곧 농성장을 정리했다. 그러나 자유당은 계획을 바꿀 수가 없었던 모양이었다. 9시 40분쯤에 사방으로 나 있는 본회의장 문이 열리면서 무술 경위들이 쏟아져 들어 왔다.
마치 범법자를 소탕하듯 국민이 뽑은 의원들을 무자비하게 끌어 냈다. 민주당 의원들을 의사당 복도에 몰아 넣은 뒤 자유당 의원들은 자기들끼리 보안법을 통과시켰다. 지금도 내 귓가에는 “이럴 수는 없다”며 절규하던 박순천(朴順天) 여사의 목소리가 생생하다.
보안법 파동과 관련, 내게는 또 하나 잊지 못할 에피소드가 있다. 당시 관제 용공 세력 만들기에 혈안이 된 자유당은 보안법 파동 전 민주당의 통일 방안인 UN 감시하의 남북 총선거조차 용공으로 몰아 붙였다. 당시 2층 기자석에 앉아 이를 지켜 봤던 나는 자유당의 행태가 하도 한심해 본회의장을 향해 냅다 소리를 질렀다.
“야, 이 자유당 놈들아. 이럴 수가 있는 거야?” 그러자 사회를 보던 민주당 곽상훈(郭尙勳) 부의장이 기자석을 향해 한마디 했다. “동아일보 이만섭 기자, 조용히 하시오.” 곽 부의장의 이 말은 아직도 국회 속기록에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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